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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을 세운 왕실의 뜻을 생각하다

[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왕릉을 지키는 사찰, 여주 신륵사

등록|2024.08.30 10:54 수정|2024.09.07 09:58
대한민국 곳곳에 숨겨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직접 걸으며 발견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문화유산 애호가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전해드립니다.[기자말]

▲ 구룡루에서 바라 본 신륵사 극락보전 ⓒ 박배민


§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
§ 주소: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73
§ 대표 문화유산: 신륵사 조사당,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이상 보물) 극락보전, 극락보전 삼장보살도(이상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탐방일: 24. 6. 18.
이번 여름 탐방은 그 어느 때보다 재밌는 문화유산 탐방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바쁜 생업에 쫓겨 제대로 문화유산을 만나지 못한 작년의 아쉬움을 올해 다 쏟아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무더위가 예고되었지만, 그 정도 더위는 내 문화유산 탐방의 열정을 달구는 연료에 불과했다.

▲ 사천왕이 그려진 불이문 ⓒ 박배민


이번 여행의 첫 탐방지는 신륵사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서너 번쯤 찾았던 곳이다. 출발지 광혜원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신륵사. 주차장,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 앞에 다다르니, 익숙한 풍경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 신륵사 불이문 앞 사육장의 토끼 ⓒ 박배민


항상 열려 있던 불이문 앞의 찻집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개점 전인가 싶어 문 앞에 다가가니, 경내로 이동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라진 찻집 대신 눈에 띈 것은 새로운 토끼 사육장이었다. 한때 찻집 뒤뜰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토끼들이 이제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스님이 토끼 사육에 갑자기 취미를 붙이신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

신륵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무려 8개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문화유산은 다름 아닌 '다층 전탑'이다. 우리나라에 탑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석탑으로, 전탑(벽돌탑)은 매우 드물다. 실제로 문화유산포털에 등록된 석탑은 500건이 넘지만, 전탑은 고작 7건에 불과하다. 특히 이 다층 전탑은 유일한 현존 고려시대 전탑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 구룡루 쪽에서 다층 전탑으로 오르는 계단 ⓒ 박배민


불이문을 넘어 남한강을 오른쪽에 두고 느긋하게 10분 정도 걷는다. 구룡루가 보인다. 구룡루를 넘어가지 않고, 우측으로 돌아, 가장 관심 있는 다층 전탑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이 넓직하고 경사도 완만하다. 한 발씩 디디며 전탑까지 오른다. 전탑 앞에 이르니 전탑 뒤로는 남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강 위로는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뽈뽈뽈 떠다닌다.

▲ 신륵사 다층 전탑 ⓒ 박배민


일반적으로 탑은 으뜸 법당이나 전각 앞에 있기 마련인데, 신륵사 다층전탑은 특이하게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를 두고 사진지리학자 이성수는 강한 강바람이 경내로 들이치는 걸 완화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이성수, <신륵사의 풍수입지와 바람길에 대한 연구>, 2016).

▲ 다층 전탑에서 보이는 남한강과 유람선 ⓒ 박배민


전탑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뭉툭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전탑의 높이가 10미터쯤 되다 보니, 사람 눈높이에서는 꼭대기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전탑의 비율도 어딘가 어정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전탑은 독특한 형태 때문에 정확한 층수를 단정 짓기 어려우나, 돌로 만든 기단 부분을 제외하고 벽돌로 된 부분부터 지붕까지를 세어 보통 7층으로 본다.

▲ 능선 쪽에서 내려다 본 다층전탑 ⓒ 박배민


고개를 숙여 기단을 살펴보니, 밑부분은 큼지막한 돌이 탑을 든든히 받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검정색 벽돌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벽돌은 그대로 쌓아 올리지 않고, 사이 사이에 하얀 흙을 채워 넣었다.

흙 없이 온전히 벽돌만으로 쌓아 올린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지붕돌 곳곳에는 푸른 잡초가 벽돌의 잿빛과 대비되며,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문화유산 보존을 위해선 잡초는 하루빨리 제거하는 게 좋겠다).

▲ 법흥사지 칠층 석탑은 벽돌과 벽돌이 딱 맞닿아 있다. ⓒ 국가유산포털


전탑에서 내려와 우측으로 돌아 극락보전을 향한다.

세종대왕릉의 이장과 신륵사

전해지는 얘기로는, 원효대사(617년~686년)가 신륵사를 창건했다고 하지만, 뒷받침하는 기록은 남아 있지는 않다. 본격적으로 신륵사를 언급하고 있는 건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종실록부터 등장하지만, 신륵사가 직접적으로 엮이는 사건은 세종대왕릉(영릉) 이장(移葬)이다. 영릉은 원래 서울 서초구에 있었으나, 묫자리가 불길하다는 왕실의 판단에, 여주로 이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신륵사는 영릉의 능침사가 됐다.

▲ 구룡루에서 바라 본 극락보전 ⓒ 박배민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왕릉의 안녕을 위해 능침사(陵寢寺,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를 두었다. 신륵사도 영릉을 이장하면서 크게 고쳐 짓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뭄이 들어 민초의 삶이 고달프니 신륵사 공사를 몇 번이나 미루자는 신하들의 간언에도 성종은 선왕(세종)을 위한 일이라며 단칼에 거절하고 밀어붙일 정도였다(성종 3년 7월 16일, 21일).

극락보전도 이때(1472)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이 552년 전 건물은 아니다. 임진왜란(1592)을 겪으면서 전소된 것을 1800년에 다시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 지붕 아래를 빼곡히 메운 공포(다포 양식)와 정사각 형태의 극락보전 현판 ⓒ 박배민


극락보전은 신륵사의 으뜸 건물이지만 위압감을 느낄 정도의 큰 건물 아니다. 그렇다고 볼품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처음 오는 사람도 부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또 들어가 볼 수 있는 수수함이 묻어 나오는 건물이다.

법당에 발을 내딛기 전, 경건히 합장하고 내부로 들어선다. 눈앞에 세 불상이 보인다. 가운데 불상은 오른손을 든 상태로 검은 머리를 하고 앉아 계시고, 좌우로는 화려한 관을 쓰고 서 있다. 가운데는 아미타불, 그리고 그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우측에는 대세지보살이다.

▲ 보는 사람 기준으로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 박배민


극락보전은 일반적으로 '무량수전'으로 불리지만, 신륵사처럼 '극락보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정토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 세계는 즐거움과 수행의 기쁨이 가득한 곳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 극락정토를 표현한 서울 지장사 극락구품도 ⓒ 국가유산포털


그저 아미타불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 마치 제주도에 가기 위해 비행기표나 배표만 구입하면 되는 것처럼, 아미타불을 믿고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뜻은 몰라도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나무아미타불(아미타여래를 믿고 의지합니다)"이라는 말 속의 '아미타불'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아미타불이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하고 읊조리기만 하면 극락정토 행 티켓을 얻을 수 있다.

신륵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보전을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의 안식처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왕실의 이장(移葬)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럼에도 왕실은 이장을 결정했다. 능을 옮기며 고단했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극락정토로 향하길 염원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외부 채널(브런치 등)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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