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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 교차된 성폭력

등록|2024.09.02 11:49 수정|2024.09.02 12:28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는 간부인 안태근 검사에게 성추행당했다고 검찰 내부통신망에 폭로했다. 8년 전 일이다. 2010년 10월 사건 이후 서지현 검사는 상관에게 문제 제기했지만, 사실은 은폐됐고 서울북부지검에서 여주지청으로, 통영지청으로 발령됐다고 한다.

서지현 검사는 2차 가해를 당하면서도 2017년 법무부 장관에게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장관은 면담 후 진상 조사를 약속했지만, 약속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이 흘러 서지현 검사는 한국 사회 미투me too 운동의 시발이 된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글을 검찰 내부통신망에 게시하게 된 것이다.

A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보고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 회사에서 당한 성추행과 성희롱, 그리고 이를 감추려는 가해자의 직장 내 괴롭힘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과 또다시 2차 가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꼬박 1년 반을 더 고민해야 했다.

마침내 A는 회사에 성추행과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 법률상 세 가지 행위는 구분되지만, 이 사건에서는 연결된 하나의 행위였다. 가해자는 먼저 A를 성희롱했다. A에게 성적 농담을 했고, 특정 신체 부위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신체 부위를 만지려는 듯한 행동을 했으며, 여성 탈의실에 따라 들어왔다. 성희롱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그렇게 위태롭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근이 잦아 늦은 시간이었고, 동료들은 퇴근하고 없었다. 사업장은 외진 곳에 있어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A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문제 제기도 하지 못했다. 최대한 가해자를 피해 회사를 계속 다닐 뿐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악몽을 꿨고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행동도 했다. A가 가해자를 피한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가해자는 사사건건 A에게 트집을 잡고 고압적인 발언을 하며 주눅 들게 했다. A보다 경력이 훨씬 많은 가해자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A를 험담했다. A와 일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가해자의 말만 듣고 A 때문에 가해자가 고생한다고 인식하게 됐다. 가해자는 A를 고립시켰다.

A의 직장은 직원 대부분이 남성인 '남초' 회사였고 업계 특성상 '까 라면 까'야 하는 군대식 문화가 있었다. 업무를 배우려면 도제식 훈련을 받아야 했다. 킴벌리 크렌쇼는 흑인 여성이 겪는 차별은 여성이라는 젠더와 흑인이라는 인종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발생한 결과라고 하면서 교차성 개념을 제시했다. 교차성 이론에 따르면 A의 젠더는 여성이고, 나이는 어렸으며, 고용 형태는 정규직이지만 아직 수습 기간이었다. A는 젠더와 연령, 불안정한 고용형태가 교차한 중첩된 차별을 겪었다. 중첩된 차별의 결과는 성폭력이었다.

2018년 눈여겨볼 만한 판례가 나왔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판결문에 등장한 최초의 사례였다. 한 대학교수는 반복적으로 학생들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 대학은 교수를 해임했고, 교수는 교원소청심사를 했지만 기각됐다. 행정법원에서도 교수에 대한 해임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인 교수 방법'으로 봤고, 학생들이 계속해서 그 교수의 수업을 수강했기 때문에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또한 교수의 성희롱적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면서도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고 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주 농담을 하거나 연애 상담을 나누기도" 했기 때문에 성희롱이 아니라고 보았다. '불필요한 신체 접촉'과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성추행과 성희롱 사실은 확인됐지만, 평소 교수와 학생들이 친하게 지냈고 수업도 계속 들었기 때문에 성추행과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였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은 진술하지 않으면서 동료의 피해 사실만 진술하고 다니는 점, 가해자와 상호 형사 고소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작성하면서 공증을 받은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로서의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성추행과 성희롱 사실을 부인한 것이다. 최악의 판결문이다.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위와 같은 2심 판결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중략)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성희롱 행위가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는 실습실이나 교수의 연구실 등에서 발생하였고, 학생들의 취업 등에 중요한 교수의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루어지기도 한 점, 이러한 행 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루어져 온 정황이 있는 점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설시했다.

가해자는 A에게 한 성추행과 성희롱 사실을 숨기고, A가 문제 제기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직장 내 괴롭힘을 하며 압박을 가했다. A는 피해를 겪고 5년 후에야 회사에 신고했다. 회사는 성추행과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모두 인정했지만, 각 행위를 별개로 보고 시효가 지났다며 직장 내 괴롭힘만 징계 사유로 삼아 가해자를 경징계했다. 회사는 중첩된 차별의 결과로 나타난 성폭력의 특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듯했다. 회사의 이런 결정은 젠더와 연령, 경력, 고용형태 등에 따른 차별을 재생산하는 구조로 조직문화를 이끌 것이다.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며 교수라는 지위를 고려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성희롱을 규율하지만, 나이가 더 어리고, 도제식으로 배워야 하며, 피평가자이기도 한 복합적인 정체성을 다 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차별이 교차된 성폭력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법이 있어도 그 효과가 닿지 않는 구멍은 더 커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월간 <비정규노동>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최혜인 법무법인 여는 변호사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68호 9,10월호 '女집합'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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