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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희로애락을 도자인형에 담았어요

[인터뷰] 설우당도예 문연임 도예가

등록|2024.09.06 09:09 수정|2024.09.06 09:12

▲ 문연임 도예가의 도자인형 작품은 관람자를 어릴 적 추억으로 데리고 간다. ⓒ 문연임 작가


도자인형조형작업의 시작은 '인형 옷 입히기 놀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같이 도화지에 만화 속 인물과 옷을 그리고 색칠하여 오린 후 옷을 입히면서 놀던 그 놀이. 그 시절 그 감성은 지금도 내 마음의 방에 남아 있다. 도자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도자 작품으로 살아나온다. - 문연임 도예가의 작가노트 중에서

8월의 어느 무더운 토요일 오후였다. 이천시 백사면에 위치한 문연임 작가의 작업실 겸 전시실을 찾았다. 그의 도자인형을 본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머, 정말 예쁘다, 도자인형 표정이 살아있네."

도자인형(토우)의 종류는 다양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본 듯한 개구쟁이 아이들, 한복을 입은 여인, 긴 드레스를 입고 야생화를 한아름 안은 아가씨, 검정 교복을 입은 소녀와 소년 등. 작품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들의 시선과 입 모양, 손동작과 발동작에서 쓸쓸함과 행복함이 느껴졌다.

문 작가가 일일이 손으로 제작했기 때문일까. 손맛 때문일까. 어떤 도자인형은 단번에 옛 추억 속으로 데리고 갔다. 어떤 작품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고 웃음 짓게 했다. 이러한 문 작가의 도자인형이 탄생 된 데에는 그의 중국 유학 이야기가 있다.

그는 2005년 12월 말에 세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경덕진에서 한복을 입은 도자인형을 선보이면서 중국 도예인들에게 화제가 됐다. 2015년 귀국한 후 현재까지 중국 및 해외 도예인들과 교류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 어떤 것이 언어와 문화 등이 다른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했나?

"나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아내나 엄마, 며느리와 딸 역할이 아닌 오롯이 '문연임'으로서 도자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절실함이 컸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고민도 유학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줬다. 당시 첫째 아이(1991년생)가 중2, 둘째 아이(1992년생)가 중1, 셋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시절 대학 입시는 입시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했다. 아이들이 방과 후에 공부를 더 하려면 학원에 다녀야 했는데 남편(대학교수)이 혼자 버는 수입으로 그 학원비를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마침 2005년에 초·중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열풍이 일었다. 그즈음 기러기아빠 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우리도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서 공부를 시키는 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했다. 이렇듯 저의 개인적인 갈망과 아이들 교육, 물가 등을 고려할 때 중국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2006년 중국 환율은 120원. 중국에서 4인 가족이 50만~80만 원 정도면 풍족하게 생활했다."

▲ 문연임 도예가, 솔직하고 유쾌하다. 그 성격이 작품에도 나온다. ⓒ 김희정


-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자 남편분이나 주변분들 반응은 어땠나?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교육자라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당연히 아이들과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 지인들은 제 걱정보다 남편 걱정을 많이 했다. '이왕 유학 가는 거 선진국으로 가라' 등 다양한 말씀을 하셨다."

- 경덕진을 택한 이유는?

"경기도 이천시는 우리나라에서 도예가나 도자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지역이다. 중국 경덕진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그랬다."

- 경덕진은 어떤 도시인가?

"2005년 12월, 당시 도시 분위기는 경기도 이천시와 비슷했다. 분지형으로 구릉지대가 많았고 양쯔강(揚子江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이 도시를 둥그렇게 감싸고 흘렀다. 농사를 짓는 등 시골 풍경도 많았다. 경덕진에는 도자와 관련된 시스템이 훨씬 더 분업화, 세분화돼 있다. 예를 들면 흙 파는 사람, 석고로 틀을 만드는 사람, 석고 틀을 떠주는 사람, 유약을 뿌려주는 사람, 도자기에 그림 그려주는 사람, 가마에서 나온 기물을 손수레에 담아 옮겨주는 사람 등 분야별로 뛰어난 장인과 탁월한 기술자도 많다.

공방 옆에 5평, 10평, 15평짜리 등 작고 큰 작업실과 도제상, 갤러리, 판매장, 전시장 등 도자업체 수백 개가 커다란 가마처럼 연결돼 있다. 10m, 20m 이상의 도판을 구울 수 있는 커다란 가마도 있다. 도자작업하시는 분들이 필요한 것을 쉽게 도움받을 수 있는 구조이다.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도 오래되고 거대한 도자기 공장이나 가마와 굴뚝 등을 허물지 않는다. 오랜 도자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살리고 실내를 리모델링하여 갤러리나 카페 등으로 사용한다. 이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어 현재 경덕진은 중국에서 관광지1호가 됐다고 하더라. 우리가 배울 점이라고 생각한다."

- 유학생활 중 특별히 신경 쓴 게 있다면?

"'말과 언어'였다. 나와 아이들은 '안녕하세요(니하오), 감사합니다(씨에씨에),' 정도의 중국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빨리, 열심히 배우라'라고 강조했다. '엄마는 나이가 있어서 중국어를 공부하기에 벅차고 중국어를 너희들보다 늦게 터득할 것이다. 대신 너희들이 언어를 빨리 습득하면 하고 싶은 공부도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아이들이 중국 선생님이나 학생들과 원활하게 소통했다."

▲ 설우당 도예 문연임 작가의 작품. 움직이지 않은 도자인형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 문연임 작가

- 타국에서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어떠셨나?

"고생했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황금기였다. 저는 1960년대 중반 광주광역시에서 4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가정이나 사회는 남성위주였고 남녀차별은 심했다. 우리집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결혼 후 가정 살림하며 아이 셋을 낳아 키웠고 대학에서 시간 강사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이 전임교수가 돼서 좋았지만, 내가 배운 지식이나 재능을 펼쳐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떠난 유학이었다. 경덕진에서 머문 십 년 동안 개인 문연임으로, 하고 싶은 공부와 작업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며 살던 시간이었다. 도자 작가로서의 욕망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풀었던 것 같다."

원광대학교 미술대학도예과 졸업한 문연임 작가는 중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하여 중국경덕진도자대학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중국 고령세계도자비엔날레 공모전에서 입선했고중국 경덕진·고령·리링 세계도자박람회 초대작가 (2010~2015), 미국오로라시 커뮤니티 컬리지 워크샵 초대작가 외 다수(2014), 프랑스 액상프로방스 페어 초대작가(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소사벌국제도예전, 등으로 참가했다. 작품은 중국 경덕진 박물관, 프랑스, 미국 등에 다수 소장돼 있다.

- 유학생활에서 아이들이 작가님한테 도움을 줬다고 하던데, 어떤 도움을 줬나?

"중국인들과 소통이 필요할 때 중학생인 둘째 아이가 동행하여 통역을 해줬다. 중국에서 세계도자기박람회 등 도자 관련 굵직한 행사가 열리면 저는 시상품을 가지고 참가했다. 그럴 때면 중국인들과 소통해야했다. 경덕진시와 중국 기관 관계자나 도자장인을 만나야 하는 자리도 많았는데 그때도 그랬다.

저처럼 외국 여성이 아들 셋을 데리고 도자를 공부하러 온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중국 사람들은 우리한테 우호적이었고 환대해줬다. 당시 세계에서 우리나라 위상이 부상하고 있었고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아이돌 그룹과 K-팝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점도 우리가 중국에서 생활하는 데에 유리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유학 간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 도자인형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언제부터 도자인형을 본격적으로 했나?

"인형 옷 입히기 놀이가 도자인형조형작업으로 이어진 것은 대학 때부터였다. 이후 중국 경덕진 대학의 석사 과정에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인체조형 수업은 문화충격이었고 인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창이 됐다. 예컨대 모든 수업 과정에 남녀노소 누드모델이 등장했다. 이때 모델마다 피부조직 또는 표정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감정이나 표정은 얼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꼬리를 치켜올릴 때와 내렸을 때, 입 모양과 눈의 표정은 말보다 더 강한 전달력을 갖는다. 신체언어, 보디랭귀지라고 하지 않나, 사람의 팔 동작 발 동작 하나에서도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이 나온다. 이를 아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중국의 다양한 전통 회화기법도 배웠다. 이는 내 작업에서 부족한 점을 빠른 속도로 채워줬고 그때마다 나는 자주 희열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과정에서 '내 작품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집약시켜 보자, 사람 이야기, 사람 느낌이 나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작업할 때마다 그 희열과 성취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 설우당도예 문연임 작가의 작품. ⓒ 문연임 작가


- 도자인형을 선보이자 중국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중국인에게 처음 선보인 작품은 한복을 입은 여자도자인형이었다. 그 작품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내 작품의 제작 비밀을 알아내고 작품을 모방하기 위해 애쓴 작가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 작품을 모방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에는 분야별 장인은 많으나, 작가가 작품의 모든 공정을 해내는 사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자 작가 대부분은 도자의 모든 공정을 섭렵하고 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빼어난 손재주 DNA도 있다. 도자 전 분야에 대한 기량이 월등할 수밖에 없다. 올해 봄, 중국 도자시장에 다녀왔는데, 내 작품과 비슷한 것을 찾지 못했다. 제 작품이 중국에서 경쟁력이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 중국 작가들이 모방할 수 없는 작가님만의 작업 비밀이 있을 것 같다.

"제 도자인형작품은 흙 배합과 작업속도, 흙의 건조상태, 신체의 균형이 중요하다. 작품의 주제가 설정되면 인물과 디테일한 부분은 상상으로 채운다. 그런 후 작품의 신체에 포인트를 줄 부분을 생각하여 최대한 빠르게 작업한다. 인형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의 건조상태가 비슷해야 완전히 건조시킨 후 가마에 넣어야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온다."

- 도자인형 안에 이야기가 있다. 웃고 있는 도자인형도 많다.

"살아오면서 내 머릿속에 잠재된 어떤 이야기가 손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웃고 있는 작품은 코로나 기간에 작업했다. 그 기간에 손님들 대부분이 웃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셨다. 현재 자신의 삶이 힘들고 우울할 땐 밝은 작품을 보면서 위로받고 힘을 얻으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 인생의 전환점이나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주저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보기를 바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어려움에 직면해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일에 아이디어가 샘솟고 지속할 수 있다. 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생각만 하지 말고 실행해봤으면 좋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현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가 많다. 배우고 생각하고 실행해야 한다."

-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실지 궁금하다.

"현재 하고 있는 작업에 충실하려고 한다. 제 작품에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구현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작업도 할 것이다. 아울러 중국, 미국 등 해외 작가와 상호 교류작업을 이어가려고 한다. 9월 25일쯤 중국에서 열릴 전시회 준비도 하고 있다.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세계 도자박람회도 참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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