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허송세월과 퍼펙트데이즈 사이에서

강제 휴가에 <허송세월>을 읽다

등록|2024.08.30 09:10 수정|2024.08.30 09:10
어느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을 노 작가이기에 책 제목에 눈길이 갔다. 김훈 <허송세월>. 언어유희와 같이 자극적인 네 글자 속에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젊은 날엔 기자로서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했고, 현직에서 물러나선 작가의 길을 걸었던 그의 수필과 소설에는 역동하는 진솔한 힘을 느낀다. 험한 산에 오르는 것과 자전거 타는 것을 즐기던 작가는 이제 어느덧 칠순을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이르렀다.

책표지책표지 ⓒ 나남출판사


산악 장비를 후배에게 넘겨주었고 자전거 타기보다는 산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노인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의 글에는 노회해지는 삶의 일상이 담겨있다. 오래간만에 들려오는 소식은 가까운 이들의 부음이고 다행히 연락이 없다면 아직 살아있거나 이미 소리 없이 사라진 후라고 적는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기록해 두었다가 꼭 써먹고 싶은 문장들을 만난다.

"혼밥을 먹는 사내들은 혼술을 마신다. 혼밥에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은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저녁에 '고향'에서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의 술맛을 나는 안다.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감기몸살인 줄 알았던 아내가 어이없게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의 반 타의 반 일주일을 집에 머물렀다. 몸을 겨우 가누워 음식을 취하는 아내의 모습이 가엾기도 했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식사도 해결해야 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꿉꿉한 습기가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는 폭염 상황이라 삼시세끼를 차리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다. 전기요금을 아끼느니 온열질환으로 쓰러지지 않으려면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을 재간이 없는 날이었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지만, 빨간색 두 줄이 선명한 아내의 진단키트를 확인하는 순간 더욱 실감 났다. 회사에서는 3일 간 쉬고 나머지 이틀은 재택으로 돌려서 집에서 근무하라는 배려를 해줬다. 덕분에 나는 의도치 않게 일주일 내내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맞대며 생활해야 했다.

하루 이틀은 같이 쉬며 맛난 것을 먹는 재미와 여유가 있었는데 무료하게 보내도 되는 시간이 무한정 이어지니 암담함이 몰려왔다. 사무실에 나간다 해도 없는 일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 불경기의 늪에서 고전하는 중이니 막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참 일 할 때는 야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토요일도 오전까지 근무를 하며 바쁘게 움직여야만 사는 것으로 인식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춘 진공의 상태를 맞은 듯한 기분이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려고 해도 할 것이 없는 시간.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치열했던 삶에서 밀려나고 주변부로 내쳐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늘그막의 삶이 기다리는 것인가 보다.

일주일을 별 일 없이 온통 아내의 몸이 회복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좋은 음식을 찾아서 먹고 산책을 하고 책을 읽다가 영화도 보면서 야외 카페로도 나갔다. 가족이 3일간 꼼짝없이 붙어있다 보니,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스터디카페를 가든 어디든 나가서 시원하게 보내다 오라고 등을 떠민다.

아이들 역시 엄마 아빠 출근 안 하냐며 혼자 있고 싶은데 집에서 편히 쉴 수가 없다고 투덜거린다. 이럴 때 보면 가족 역시 적당한 거리와 떨어진 시간이 있어야 다시 그리워지기 마련인가 보다.

일주일의 강제 휴가를 마치자 나와 아내는 다시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아이들도 개학해서 다시 바빠진 일상으로 돌아갔다. 머지않아 노년의 삶이 시작되면 정말 바쁠 것 없이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이 기다릴 수도 있겠다. 그때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삶을 이어가고 경제를 꾸려갈 것인지 아직은 막연한 감이 있다.

'허송세월'이라 적었지만 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애쓰는 노 작가의 삶을 본받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인생은 허송세월로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