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 죽인 일본 자경단, '살인면허' 있었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간토조선인학살 101주기... 일본이 감추는 자경단의 실체
도쿄를 비롯한 관동 6개 현에서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의 기일이 다시 돌아왔다. 벌써 101주년이다. 2023년인 지난해 백 주년을 맞아 한일 시민운동은 일본 정부에 진상조사와 사과를, 한국 정부에는 '간토학살 진상규명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허무하게 1년이란 시간이 또 흘렀다.
일본은 101년 동안 정부 책임을 부정하며 "지진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에 흥분한 일부 자경단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는 학살의 국가 책임을 면하려는 거짓 설명이다. 백 보 양보해 일본 정부와 극우의 주장대로 학살의 책임자가 자경단이라고 하면 일본 정부는 책임을 비켜갈 수 있을까? 재난 속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바로 자경단의 정체 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극우가 밝히지 않고 우리 역사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 자경단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자경단은 대지진 당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막고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순한 자치 조직이 아니었다. '자경단'이란 이름이 주는 '헷갈림'을 걷어내고 보아야 한다. 자경단은 경찰의 하청 조직이고 준 군사 집단이며 학살의 DNA를 갖춘 무장 조직이었다. 이제 그 비밀을 들여다보자.
경찰의 하청 조직으로 탄생한 자경단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를 비롯해 일본 전역에 생긴 자경단의 수는 1923년 10월 하순 기준으로 무려 3689개였다.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대규모 자경단이 결성되었을까. 이는 지역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하지만 '보안조합'에서 유래를 찾아야 한다.
1918년 일본에서는 저 유명한 쌀 폭동이 일어났다. 그해 8월 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내각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섭 전쟁을 벌인다고 선언하자 쌀 도매상은 전쟁 특수를 노리고 매점 매석에 나섰다. 쌀값은 3~4배 이상 가파르게 치솟아 분노한 민중이 도야마(富山)의 작은 어촌을 시작으로 쌀 가게를 습격하고 불을 지르는 항거에 나섰다.
전국 300여 지역에서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이를 탄압하느라 10만이 넘는 병력이 출동했을 정도다.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 일본의 치안 당국이 세운 방책이 바로 '국민 경찰' '민중의 경찰화'였다. 지역 유지를 매개로 민중을 경찰 주변으로 포섭해야 앞으로 일어날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일본 전 지역에서 보안조합 혹은 안보조합이 지역 경찰의 독려 속에 만들어진다. 보안조합의 규약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경찰과 협력해 마을 내 안녕을 유지하고,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조합원은 "범인의 인상착의 및 행선지에 대해 즉각 보고하여 체포에 협력하고 증거품을 보존"하는 의무를 다해야 했다. 조합 창립식에 지역 경찰서장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축사를 했다.
대학살 직전인 1923년 4월 30일, 지바현의 아다치 경찰부장이 이 현의 소방조장회의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국의 조합원 수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 휘하에 강력한 민간 경찰, 언제든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자경단 출생의 비밀이다. 순수한 상부상조나 마을 자치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이 보안조합이 순식간에 수천 개의 자경단으로 탈바꿈, 조선인 학살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자경단의 핵심은 동학농민군·의병·독립군 탄압했던 재향군인
그렇다면 자경단에는 어떤 사람이 참여했을까? 이는 자경단 결성의 유래와 함께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점이다. 청년단이나 소방단도 자경단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중핵은 '재향군인회'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개병제를 시행했으나 파쇼화된 1930년대 이전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군대로 끌려갔다. 이들이 경험했던 전선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1894년 동학농민군과 치른 싸움이 있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가 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에는 어느 병사의 진중일지가 소개된다. 1895년 1월 8~10일에 벌어진 장흥전투에서 "우리 부대가 서남 방면으로 추격해서 타살한 농민군이 48명, 부상한 생포자는 10명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생포자는 고문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라고 쓰여있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얼마나 잔학하게 죽였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동학농민군을 짓밟은 일본은 1910년 한반도 강점에 맞서 일어난 의병운동 역시 도륙한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조선의 빨치산 부대와 수많은 전선이 형성되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조선독립군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를 즐겼던 군인이 고향에 돌아와 만든 조직이 재향군인회였다. 이는 자율조직이 아니라 일본 육군의 일부여서 규율도 엄격했다고 한다. 이런 재향군인회가 자경단을 어떻게 끌고 갔을지는 눈을 감고도 짐작할 만하다.
재향군인회는 정신무장까지 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과 '조선은 아시아의 작은 야만국'이라는 후쿠다 유키치의 '멸시론'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그 첫걸음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침탈을 꼽았다. 멀리 보되 작은 것부터 도모하자며 내세운 방안이었다.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주역이 되었으니 요시다의 침략주의는 1854년 <유수록>으로 세상에 나온 지 불과 반세기도 안돼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자경단은 요시다 쇼인과 이토로 이어지는 침략주의에 환호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를 되새기며 홋카이도, 대만, 조선에 이어 더 많은 식민지 침탈을 꿈꾸었을 터이다.
자경단의 '침략주의'와 '조선인에 대한 적대관'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고쿠류 가이(黑龍會)와 고쿠스 이카이(國粹會)였다. 고쿠류 가이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도하여 창립한 극우단체로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적잖은 낭인이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 관동군의 밀정 노릇을 했는데 우리 독립군을 대상으로 정탐, 이간질, 암살 작전 등을 수행했다. 간토대지진 당시는 일본도를 들고 조선인 학살에 앞장서 자경단의 폭력을 부추겼다.
자경단은 이렇듯 준군사조직이며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집단,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지면 조선인 살인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의 묵인이나 지시없이 살인에 나설 수 있었을까? 이들에겐 면허가 필요했다. 면허만이 아니라 살육을 부추기고 지시한 장본인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과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다.
일왕과 총리, 살육 허가하고 부추긴 장본인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진도 7.8의 대지진, 이재민이 수백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울부짖음과 고통이 도쿄와 요코하마에 가득할 때 히로히토와 야마모토 총리는 이재민 구호를 생각하기보다 천황 체제의 안전과 수호만을 걱정했다. 몇 해 전의 쌀 폭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방책을 고민했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대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내전 상황이 아니고 외적과 교전중이 아닌데도 헌법이 정한 요건과 절차를 무시하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히로히토는 이를 재가했고 야마모토는 이를 실행했다. 명분은 '조선인 습격설'이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전역은 물론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에도 전문을 보낸다.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不逞)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라는 내용으로 정부 자신이 허구와 거짓으로 가득한 전문을 보냈으니 유언비어의 거대 제조 공장 노릇을 한 셈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계엄령에 따라 출동해 당시 가메이도에서 근무하던 육군 야전중포병 제3여단 제1연대 제6중대의 병사인 구보노 시게지(久保野茂次)는 9월 2일 자 자신의 일기에 끔찍한 장면을 남겼다.
계엄군의 출동과 함께 활동 명령을 받은 자경단은 군대와 경찰 밑에서 연합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군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살인을 지시했다. 시부야(渋谷)의 자경단원이었던 하야시 히데오(林英夫)는 9월 2일 육군 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리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고 증언했다. 재향군인회 회원이었던 가와사키 다카쓰는 근위보병 제1연대가 사용하던 총 30자루와 실탄 600발을 대여받았다고 회고했다.
군은 자경단에게 지시하고 무기까지 공급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시미즈 이쿠타로(清水幾太郎)가 펴낸 수기 <간토대진재>에 니노바시 시게가즈(二橋茂一)의 목격담이 나온다.
살인면허를 받은 자경단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계엄당국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치닫자 일본 정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시에도 도쿄와 요코하마는 국제 도시였다. 보는 눈이 많았다. 바다 건너로 이 학살 소식이 전파될까 전전긍긍했다. 9월 6일 계엄사령부는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저들도 우리의 동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가증스러운 명령을 내린다. 이미 조선인 수천 명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후에 허겁지겁 가면을 뒤집어쓴 것이다.
전말은 너무나 뚜렷하다. 간토대학살은 일본 정부가 기획하고 군대·경찰·자경단을 동원하여 실행한 학살극이다. '흥분한 자경단의 우발적인 소행'이라는 말로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 설령 백 보 양보해 이 말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경단은 정부로부터 살인면허를 받은 학살의 주역이었기에 일본 정부는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안중근 참모중장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되새겨야 할 때
진실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일본 정부에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들려오는 소식은 암울할 뿐이다. 김문수·김형석 같은 이들이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주장을 버젓이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이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할 때 세운 식민지 정책은 "조선을 일왕의 대권으로 통치하고 무관 총독이 독재한다"였다. 조선에는 일본의 헌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주민에게 참정권 같은 권리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 국민으로 대우했다면 일본의회에 한반도의 대표가 파견되든지 독자적인 조선의회가 구성되어야 했을 터이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경제 블록을 구성하면서도 일본의 화폐와 조선의 화폐를 구분했다. 조선의 경제가 수탈될 대로 수탈되어 망가지면 그 여파가 일본 내로 미칠 수도 있기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에는 일본은행권 '엔'을, 조선에는 조선은행권 '원'을 쓴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비용을 조선은행권 지폐를 마구 찍어내 충당했다. 1945년 패망을 전후해서는 퇴각자금을 위해 지금 돈으로 무려 1조 원에 해당하는 13억 원을 발행했다. 해방 후 극심 후 인플레의 원인은 일본의 통화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36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조선인을 국민으로 대한 적이 없다. 오로지 착취와 탄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는 평화적 독립과 완전한 자주 독립을 선포하고 국토 회복을 결의했다. 대일굴욕외교라고 평가받는 1965년 한일협약 체결 시에도 "일제강점이 무효임"을 선언한 바 있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였다. 1943년 미·영·중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의하면서 "노예상태에 놓여있는 한국을 독립시킨다"라고 뜻을 모았다. 이는 1945년 7월 미·영·중 정상이 모인 포츠담선언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일본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했다. 한국 지배가 불법이고 무효임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 이래 치열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일본의 지배는 강압이고 무효라는 국제사회의 정신과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식하고 몰역사적인 주장일 뿐이다.
간토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과 징병,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유령이 되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친일 반민족 세력은 이제 가면을 던지고 거리를 활보한다.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니 '이완용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느니' 하는 어지러운 말이 떠돈다. 심지어는 독도의 한일공동관리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마지막 유묵을 남겼다. 간토조선인대학살 101주년을 맞는 오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헌신함은 독립군과 대한사람의 본분이다"라는 안중근 참모중장의 뜻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본은 101년 동안 정부 책임을 부정하며 "지진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에 흥분한 일부 자경단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는 학살의 국가 책임을 면하려는 거짓 설명이다. 백 보 양보해 일본 정부와 극우의 주장대로 학살의 책임자가 자경단이라고 하면 일본 정부는 책임을 비켜갈 수 있을까? 재난 속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경찰의 하청 조직으로 탄생한 자경단
▲ 1923년 활동한 자경단자경단은 조선인 학살의 주역이었다. ⓒ 니시자키 마사오 제공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를 비롯해 일본 전역에 생긴 자경단의 수는 1923년 10월 하순 기준으로 무려 3689개였다.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대규모 자경단이 결성되었을까. 이는 지역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하지만 '보안조합'에서 유래를 찾아야 한다.
1918년 일본에서는 저 유명한 쌀 폭동이 일어났다. 그해 8월 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내각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섭 전쟁을 벌인다고 선언하자 쌀 도매상은 전쟁 특수를 노리고 매점 매석에 나섰다. 쌀값은 3~4배 이상 가파르게 치솟아 분노한 민중이 도야마(富山)의 작은 어촌을 시작으로 쌀 가게를 습격하고 불을 지르는 항거에 나섰다.
전국 300여 지역에서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이를 탄압하느라 10만이 넘는 병력이 출동했을 정도다.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 일본의 치안 당국이 세운 방책이 바로 '국민 경찰' '민중의 경찰화'였다. 지역 유지를 매개로 민중을 경찰 주변으로 포섭해야 앞으로 일어날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일본 전 지역에서 보안조합 혹은 안보조합이 지역 경찰의 독려 속에 만들어진다. 보안조합의 규약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경찰과 협력해 마을 내 안녕을 유지하고,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조합원은 "범인의 인상착의 및 행선지에 대해 즉각 보고하여 체포에 협력하고 증거품을 보존"하는 의무를 다해야 했다. 조합 창립식에 지역 경찰서장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축사를 했다.
대학살 직전인 1923년 4월 30일, 지바현의 아다치 경찰부장이 이 현의 소방조장회의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국의 조합원 수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 휘하에 강력한 민간 경찰, 언제든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자경단 출생의 비밀이다. 순수한 상부상조나 마을 자치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이 보안조합이 순식간에 수천 개의 자경단으로 탈바꿈, 조선인 학살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자경단의 핵심은 동학농민군·의병·독립군 탄압했던 재향군인
그렇다면 자경단에는 어떤 사람이 참여했을까? 이는 자경단 결성의 유래와 함께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점이다. 청년단이나 소방단도 자경단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중핵은 '재향군인회'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개병제를 시행했으나 파쇼화된 1930년대 이전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군대로 끌려갔다. 이들이 경험했던 전선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1894년 동학농민군과 치른 싸움이 있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가 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에는 어느 병사의 진중일지가 소개된다. 1895년 1월 8~10일에 벌어진 장흥전투에서 "우리 부대가 서남 방면으로 추격해서 타살한 농민군이 48명, 부상한 생포자는 10명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생포자는 고문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라고 쓰여있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얼마나 잔학하게 죽였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동학농민군을 짓밟은 일본은 1910년 한반도 강점에 맞서 일어난 의병운동 역시 도륙한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조선의 빨치산 부대와 수많은 전선이 형성되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조선독립군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를 즐겼던 군인이 고향에 돌아와 만든 조직이 재향군인회였다. 이는 자율조직이 아니라 일본 육군의 일부여서 규율도 엄격했다고 한다. 이런 재향군인회가 자경단을 어떻게 끌고 갔을지는 눈을 감고도 짐작할 만하다.
재향군인회는 정신무장까지 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과 '조선은 아시아의 작은 야만국'이라는 후쿠다 유키치의 '멸시론'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그 첫걸음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침탈을 꼽았다. 멀리 보되 작은 것부터 도모하자며 내세운 방안이었다.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주역이 되었으니 요시다의 침략주의는 1854년 <유수록>으로 세상에 나온 지 불과 반세기도 안돼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자경단은 요시다 쇼인과 이토로 이어지는 침략주의에 환호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를 되새기며 홋카이도, 대만, 조선에 이어 더 많은 식민지 침탈을 꿈꾸었을 터이다.
자경단의 '침략주의'와 '조선인에 대한 적대관'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고쿠류 가이(黑龍會)와 고쿠스 이카이(國粹會)였다. 고쿠류 가이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도하여 창립한 극우단체로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적잖은 낭인이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 관동군의 밀정 노릇을 했는데 우리 독립군을 대상으로 정탐, 이간질, 암살 작전 등을 수행했다. 간토대지진 당시는 일본도를 들고 조선인 학살에 앞장서 자경단의 폭력을 부추겼다.
자경단은 이렇듯 준군사조직이며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집단,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지면 조선인 살인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의 묵인이나 지시없이 살인에 나설 수 있었을까? 이들에겐 면허가 필요했다. 면허만이 아니라 살육을 부추기고 지시한 장본인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과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다.
일왕과 총리, 살육 허가하고 부추긴 장본인
▲ 일본 정부가 보낸 전문일본 정부는 이 전문에서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 자료사진
▲ 계엄령 조문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 자료사진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진도 7.8의 대지진, 이재민이 수백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울부짖음과 고통이 도쿄와 요코하마에 가득할 때 히로히토와 야마모토 총리는 이재민 구호를 생각하기보다 천황 체제의 안전과 수호만을 걱정했다. 몇 해 전의 쌀 폭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방책을 고민했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대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내전 상황이 아니고 외적과 교전중이 아닌데도 헌법이 정한 요건과 절차를 무시하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히로히토는 이를 재가했고 야마모토는 이를 실행했다. 명분은 '조선인 습격설'이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전역은 물론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에도 전문을 보낸다.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不逞)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라는 내용으로 정부 자신이 허구와 거짓으로 가득한 전문을 보냈으니 유언비어의 거대 제조 공장 노릇을 한 셈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계엄령에 따라 출동해 당시 가메이도에서 근무하던 육군 야전중포병 제3여단 제1연대 제6중대의 병사인 구보노 시게지(久保野茂次)는 9월 2일 자 자신의 일기에 끔찍한 장면을 남겼다.
모치즈키(望月) 상등병과 이와나미(岩波) 소위는 재해지 경비 업무를 띠고 고마스카와에 가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온순하게 복종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200명이나 참살했다. 부인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으며 혹은 철삿줄로 목을 묶어 연못에 던져 넣었다.
계엄군의 출동과 함께 활동 명령을 받은 자경단은 군대와 경찰 밑에서 연합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군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살인을 지시했다. 시부야(渋谷)의 자경단원이었던 하야시 히데오(林英夫)는 9월 2일 육군 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리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고 증언했다. 재향군인회 회원이었던 가와사키 다카쓰는 근위보병 제1연대가 사용하던 총 30자루와 실탄 600발을 대여받았다고 회고했다.
군은 자경단에게 지시하고 무기까지 공급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시미즈 이쿠타로(清水幾太郎)가 펴낸 수기 <간토대진재>에 니노바시 시게가즈(二橋茂一)의 목격담이 나온다.
다음 날 아침 동네 사람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경찰이 남자 한 명을 연행해 가는 것을 한 무리의 군중들이 '조선인, 조선인'이라고 욕하면서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군중들은 경관을 밀쳐내고 남자를 가로채어 근처 연못에 내동댕이쳐 놓고 세 사람이 커다란 몽둥이를 가져와 살아있는 사람을 떡 치듯이 퍽퍽 내리쳤습니다.
살인면허를 받은 자경단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계엄당국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치닫자 일본 정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시에도 도쿄와 요코하마는 국제 도시였다. 보는 눈이 많았다. 바다 건너로 이 학살 소식이 전파될까 전전긍긍했다. 9월 6일 계엄사령부는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저들도 우리의 동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가증스러운 명령을 내린다. 이미 조선인 수천 명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후에 허겁지겁 가면을 뒤집어쓴 것이다.
전말은 너무나 뚜렷하다. 간토대학살은 일본 정부가 기획하고 군대·경찰·자경단을 동원하여 실행한 학살극이다. '흥분한 자경단의 우발적인 소행'이라는 말로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 설령 백 보 양보해 이 말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경단은 정부로부터 살인면허를 받은 학살의 주역이었기에 일본 정부는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안중근 참모중장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되새겨야 할 때
▲ 대통령실 안보실차장 김태효는 '일본의 마음'을 강조해 논란을 빚었다. ⓒ 남소연
진실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일본 정부에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들려오는 소식은 암울할 뿐이다. 김문수·김형석 같은 이들이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주장을 버젓이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이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할 때 세운 식민지 정책은 "조선을 일왕의 대권으로 통치하고 무관 총독이 독재한다"였다. 조선에는 일본의 헌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주민에게 참정권 같은 권리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 국민으로 대우했다면 일본의회에 한반도의 대표가 파견되든지 독자적인 조선의회가 구성되어야 했을 터이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경제 블록을 구성하면서도 일본의 화폐와 조선의 화폐를 구분했다. 조선의 경제가 수탈될 대로 수탈되어 망가지면 그 여파가 일본 내로 미칠 수도 있기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에는 일본은행권 '엔'을, 조선에는 조선은행권 '원'을 쓴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비용을 조선은행권 지폐를 마구 찍어내 충당했다. 1945년 패망을 전후해서는 퇴각자금을 위해 지금 돈으로 무려 1조 원에 해당하는 13억 원을 발행했다. 해방 후 극심 후 인플레의 원인은 일본의 통화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36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조선인을 국민으로 대한 적이 없다. 오로지 착취와 탄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는 평화적 독립과 완전한 자주 독립을 선포하고 국토 회복을 결의했다. 대일굴욕외교라고 평가받는 1965년 한일협약 체결 시에도 "일제강점이 무효임"을 선언한 바 있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였다. 1943년 미·영·중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의하면서 "노예상태에 놓여있는 한국을 독립시킨다"라고 뜻을 모았다. 이는 1945년 7월 미·영·중 정상이 모인 포츠담선언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일본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했다. 한국 지배가 불법이고 무효임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 이래 치열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일본의 지배는 강압이고 무효라는 국제사회의 정신과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식하고 몰역사적인 주장일 뿐이다.
간토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과 징병,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유령이 되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친일 반민족 세력은 이제 가면을 던지고 거리를 활보한다.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니 '이완용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느니' 하는 어지러운 말이 떠돈다. 심지어는 독도의 한일공동관리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마지막 유묵을 남겼다. 간토조선인대학살 101주년을 맞는 오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헌신함은 독립군과 대한사람의 본분이다"라는 안중근 참모중장의 뜻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다가온다.
▲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마지막 유묵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2월 13일 당시 국방부가 안중근 장군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정신을 다짐하고 있다. ⓒ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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