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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낳은 헤어질 결심... 공권력은 어디에?

[리뷰] KBS <추척 60분>

등록|2024.09.01 15:29 수정|2024.09.01 15:32

▲ KBS <추적 60분>의 한 장면. ⓒ KBS


"피해자는 한번 피해 당한 걸로는 신고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친밀한 관계일 때는 반복적,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은 다음에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울 때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고받은 경찰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면 '가해자 처벌하실 거냐, 사건 접수할 거냐?'라고 물어본다. 그럴 때 피해자는 굉장히 당혹스러울수밖에 없다. 반의사불벌죄를 이렇게 친밀한 관계폭력에 적용하는 국가는 없다. 이는 피해자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공모라고 할수 있다."

'교제폭력과 살인'이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된지는 오래됐다. 연인이 이별을 통보한데 따른 보복으로 인한 각종 범죄를 의미한다. 최근 교제살인은 세대와 직업, 환경을 가리지않고 빈번하게 속출하며 이제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었던 그들은 왜 잔혹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어야 했을까.

8월 30일 방송된 KBS 시사고발 <추적 60분>에서 '헤어질 결심, 그 후 2024 교제살인 보고서' 편이 통하여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제살인의 양상과 대책을 조명했다.

친밀한 관계의 함정

경찰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살인범죄(미수 포함) 피의자는 총 778명이었고 그중 약 25%에 이르는 192명이 전·현 배우자-애인같은 친밀한 관계 사이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르 드러났다.

지난 7월 20일, 충북 충주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여사장 고 김선영 씨가 교제하던 50대 남성으로부터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가 밝힌 살해 동기는 전날 있었던 김 씨의 이별 통보때문이었다고 한다.

가해자의 지인은 가해자가 평소 여성에게 신사적이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며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은 전혀 달랐다. 유족들은 가해자가 평소에도 이미 피해자에게 집착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정반대의 증언을 했다.

여기서 김미영 진술분석 전문가는 교제폭력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조 증상으로 가해자의 '강압적 통제 행위(Corecive control)'를 꼽았다. 이는 상대에 대한 일상에 대한 간섭과 규제, 모욕과 비난, 행동의 자유 침해, 대인관계 단절 및 고립유도 같은 가해행위를 일컫는다.

전문가는 "이런 행위들은 사실 우리가 보면 가시적이나 폭력적인 행위로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강압적 통제가 결국 교제폭력이나 살인까지 이어지는 굉장이 강력한 전조증상이 된다는 것"이라고 그 심각성을 설명했다.

교제폭력 피해자인 이주연 씨(가명)는 학원 강사 출신의 30대 여성으로 사귀던 남성에게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신이 말에 반항하거나 거절하는 반응을 보이면, 태도가 돌변하여 반말과 폭언을 하고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기 일쑤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통화를 분석한 전문가는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한 사람의 강요와 압박이다. 피해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종속된 노예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은 가해자-피해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계적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또다른 전문가는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마음을 보여줘야 내가 사랑받고있는 가치를 느끼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윽박질리서 결과물을 얻게되면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할수 없는 거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서 폭력성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했다.

피해자 주연씨는 가해자의 감시를 피하여 간신히 경찰에 도움에 요청할수 있었다. 가해자는 이후로도 몇 달 가까이 일방적인 문자를 보내며 피해자를 압박했고, 피해자는 가해자와 마주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사해야했다. 그리고 신고한지 무려 4개월이 지나서야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여전히 교제폭력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는 "제일 힘든건, 앞으로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이대로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관계가 남겨 놓은 게 그런 것 같다"며 씁쓸한 심경을 밝혔다.

안전이별이 화두가 되다

교제폭력과 살인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등장한 신조어 중 하나가 '안전이별'이다. 최근에는 돈을 받고 안전이별을 돕는다는 업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피해자들은 안전이별을 하지못하고 가해자의 폭력와 위협에 노출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수의 피해자들은 경찰에 수차례 신고를 했음에도 제대로 보호를 받지못하고 심각한 피해를 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이후에야 겨우 가해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23년 부산 교제살인 미수 피해자인 윤소희 씨(가명)는, 범행 이전 이미 주거침입과 협박 혐의로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가해자의 말만 믿고 그대로 풀어줬다며 안이한 경찰의 대처를 지적했다.

가해자는 이후 흉기를 준비하고 피해자의 직장까지 찾아와 교제를 이어갈 것을 요구하다가 거질당하자 피해자에 대한 살인미수를 저질렀다. 피해자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피해자는 "따뜻했다고 생각했던 경찰이 나를 죽일수 있도록 가해자의 말을 믿고 기회를 준 사람이구나 싶으니까 생각이 바뀌더라"며 무능한 경찰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가해자가 여러 차례 피해자를 찾아와 위협했다면 그 신고전화를 받은 경찰관은 피의자 조사가 아니라 당장 체포하러 갔어야 했다. 그런데도 조사하면서 피해자의 전화를 피의자 앞에서 받으며 피해자 신분을 노출했다. 이는 명백한 경찰관의 잘못이 인정되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서 관계자는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피해자는 현재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난 4월 경남 거제에서는 고 이효정 양이 전 남친에 의하여 교제살인을 당하는 안타까운 비극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생전에 무려 12번이나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경찰은 매번 쌍방폭행이나 연인간의 사소한 다툼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담당기관이었던 거제경찰서 측은 "경찰이 피해자를 보호할 수는 있지만, 가해자에게 피해자에게 오지말라고 방어하는 법은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했다.

교제폭력 피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찰에 신고를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에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행위를 안이하게 생각하는 경찰의 문제점을 성토했다. 허 조사관은 법적 근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의사불벌죄를 친밀한 관계에 적용하는 국가는 없다. 이는 국가가 피해자를 더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또다른 전문가는 교제폭력 가해자들의 주요한 특징으로 "연인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데 가해자들은 교제를 하게 되면 동등하기보다는 '내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는 심리를 많이 보인다"며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

법과 제도, 공권력의 적극 개입 필요

2015년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이러한 강압적 통제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사례가 나온 바 있다. 고 클로이 홀랜드는 연인이었던 가해자의 강압적인 통제에 1년여간 시달리다가 23세의 젋은 나이로 극단적 선택을 하며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는 평소에 클로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위치추적까지 일삼았고, 클로이가 세상을 떠난 후 만난 또다른 연인에게도 같은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의 모친 샤론 홀랜드는 가해자의 강압적 통제 행위가 인정된데서 더 나아가 자살방조와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하는 속칭 '클로이 법'의 제정을 위한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 샤론은 "강압적 통제행위의 피해자는 여성과 소녀가 많지만, 남성에게도 있는 일이다. 누구나 보호받아야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최근 22대 국회에서는 새로운 교제폭력 관련법안이 발의되면서 이중 2개 법안에서 최초로 강압적 통제행위를 명시하여 눈길을 끌었다.

허민숙 조사관은 "강압적 통제 행위가 법적 규정과 조항으로 들어오게되면 수사관들의 지침이 달라진다. 피해자에게 필요한 질문을 하고 통제 피해자로 확인된 경우에는 반드시 보호조치를 해야한다. 그렇다면 정말 많은 피해자가 신고하고 생존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중요성을 설명했다.

상대방을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과 욕구는 결국 살인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요인이 된다. 피해자의 안전을 위해서 공권력이 적절하게 개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지난 교제폭력 사건들이 우리에게 주는 절실한 교훈이다. 헤어질 결심에도 안전할 수 있는 사회는 과연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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