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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싫어서' 해외 떠난 청년들의 진짜 속내

자기답게 살려는 독립 선언이자 용기 있는 개인주의의 선언

등록|2024.09.07 20:10 수정|2024.09.07 20:10
(*이 기사는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싫었다. 숨 막히는 경쟁, 끊임없는 비교, 그리고 그 속에서 나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이 나를 짓눌렀다. 사회는 우리를 'N포 세대'라 불렀다. 취업, 연애, 결혼, 집 마련, 심지어는 꿈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나의 20대는 무기력하고 답답했다. 자꾸만 포기하다가는 내 삶이 불행으로 가득 찰까 두려워, 나는 눈을 돌려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벗어나고 싶었다. 마치 최근 개봉한 고아성 주연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처럼 말이다.

언어와 문화 달라도, 한국보다 더 나은 이유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 속 주인공 계나는 한국에서 계약직을 전전하다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20대 청년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계나가 호주로 떠난다. 좋은 대학 졸업장도, 안정된 직장도, 부유한 부모도 없는 계나는 한국에서의 팍팍한 삶을 뒤로 하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 막차를 탄다. 학력, 직장, 재력, 외모 등 한국에서의 사회적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고자 한 것이다.

▲ 배우 고아성 주연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 포스터 ⓒ 영화 <한국이 싫어서>


영화는 계나뿐 아니라 우리 청년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수년 간 고시 준비에 매달리다 세상을 떠난 친구 경인, 어렵사리 기자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전 남자친구 지겸, 인디 음악계에서 자신만의 꿈을 좇는 계나의 동생과 그 남자친구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 모습에서 내 20대와 많은 한국 청년들이 겹쳐졌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호주 여행에서 만난 한인 청년들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호주에서 만난 청년들은, 한국보다 높은 물가, 언어 장벽, 낯선 환경인데 왜 한국에 돌아가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는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에요. 한국에서는 내가 나답게 사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문제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그 자체로 인정받아요."

그들은 한국에서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편함과 외로움을 감수하더라도 호주에서 '나답게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대학을 자퇴하고 동생과 함께 영주권을 목표로 호주로 유학 온 남매, 8년 간 바리스타로 일하다 사무직으로 커리어 전환을 준비하는 청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전 세계에서 주목 받는 조각가, 초등학교 교사에서 셰프로 변신한 청년 등 다양한 한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관련 연재: 한국인의 눈으로 본, 기회의 땅 '호주' https://omn.kr/296tn ).

▲ 호주 퍼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조 조각가 Jina Lee ⓒ 김도희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이 싫어서 떠난 이유가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가족조차 잘 인정해 주지 못하는 각자의 고유성이 온전히 인정받고, 이를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 이런 의미에서 호주에서 많은 청년들이 각자의 몫을 해내며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호주에서 만난 청년들은 "한국에서의 성공 기준은 너무 한정적이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실패자로 낙인 찍힌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호주는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직업이나 학력에 따른 차별이 적어 자신의 선택과 존재가 존중 받는다고 느낀단다.

호주 이민 45년 차 교민에 따르면, 현지에서 가장 선호되는 직업이 배관공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근무 시간이 유연하고 시급이 높아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행복이란 눈치 없는 삶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 10년 간 나는 36개국을 여행하고 4개국에서 살았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여정의 끝에서 나는 스웨덴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는 어딘가에 맞춰야만 했던 삶에서 벗어나, 스웨덴에서는 오롯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물론, 집단주의와 물질주의가 은근한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스웨덴에서의 2년 간의 삶은 그 자체로 소중했다. 그곳에서 나는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으며, 돈보다도 '나 다운 삶', '있는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은 삶'이 진정한 행복의 시작임을 배웠다.

tvN <유 퀴즈 온더 블럭>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가 행복의 주관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 tvN


얼마 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행복 연구자 서은국 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의 핵심이 '나 다운 삶'과 '내 사람들과의 양질의 시간'에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한국인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건강한 개인주의와 사회적 관계의 결핍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며, 공동체 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해왔던 셈이다. 작은 일상 속 선택조차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놓치고 있다.

영화를 본 후 나는 행복이란 '눈치 없는 삶'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 영화 속 주인공 계나, 그리고 나 자신까지 모두 다르지만 같은 존재였다. 더 나 다운 삶을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모험가들. <한국이 싫어서>라는 강렬한 타이틀을 보면, 이들은 누군가에겐 비겁한 도망자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자 나로 사는 삶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과정이다.

▲ 호주 내에서 한국인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시드니. 대표 명소 하버브릿지(좌)와 오페라하우스(우)가 아름답다. ⓒ 김도희


유시민 작가는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누구나 이 나라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자유가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대안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이민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를 바꾸는 것이다. 강제로 떠났던 조상들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민을 선택해 전 세계에 터를 잡은 동포들도 적지 않다. 재외동포청에 따르면 현재 재외 동포 수는 약 700만 명에 달한다. 남아서 변화를 선택한 이들도 있지만, 떠나는 것도 실존적 선택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

영화 속 계나는 우여곡절 끝에 뉴질랜드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새로운 학위를 따고, 연애하고, 친구를 사귀며 자신만의 삶을 꾸려간다. 그 삶 역시 쉽지만은 않지만 내 눈에 계나는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영화 말미 잠시 한국에 돌아온 계나, 그녀는 익숙한 환경과 소중한 가족 곁에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갔을까? 영화는 그녀가 또 다른 나라로 떠날 것을 암시하면서 끝이 난다.

그렇다면 계나가 한국도, 뉴질랜드도 싫어서 떠나는 걸까?

정답은 아마 계나만이 알 것이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계나의 모습은 소위 '헬조선'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나의 20대, 그리고 낯선 호주에서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사는 청년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청년들의 담담한 목소리는 도망자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익숙함을 벗어나 자기답게 살고자 하는 낯선 세계에서의 독립 선언이자, 용기 있는 개인주의의 선언이라고 본다.

그곳이 어디든, 나로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용기를 매일 조금씩 키워가보자. 각자가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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