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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녀 나오는데 로맨스가 없네? 근데 이 감정 뭐지

[리뷰] 영화 <새벽의 모든>

등록|2024.09.06 16:00 수정|2024.09.06 16:00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젊은 남녀가 주인공인데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영화라면 대개 사랑 이야기다. 엄밀하게 말해 사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이 사건이다. 사건이 없고 사랑마저 없는 영화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소설의 3요소가 주제·구성·문체이고 소설구성의 3요소가 인물·사건·배경이라는 교과서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복잡한 논의가 될 테지만,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어쩌면 사건 없는 전개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예술인 영화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만들기가 어려워 보인다.

새벽

▲ 영화 <새벽의 모든>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일본의 차세대 기대주 감독 미야케 쇼의 영화 <새벽의 모든(夜明けのすべて·All the Long Nights)>에는 사건이 없다. 남녀 두 주인공이 영화를 거의 끌어가는데 로맨스도 없다. 물론 보기에 따라 사건이 있고 로맨스가 있지만, 영화적 클리셰 목록에는 안 보이는 사건이자 로맨스이다. 남성과 여성인 인간의 관계 맺음과 소통, 그리고 상호 위로가 있다.

<새벽의 모든>은, 애매한 장르이지만 예술영화이다. 예술영화이기에 사건과 로맨스 없이 구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제목이 흥미롭다. 원제는 '새벽의 모든 것'으로 봐야 할 듯한데 한국어는 '새벽의 모든'으로 여백이 있게 번역했다. 새벽을 뜻하는 여러 일본어 단어 가운데 '夜明け(일본어 발음으로 요아케)'을 선택한 게 재미있다. '夜明け'은 새벽이란 뜻이지만 단어조성에 대조를 담았다. 즉 '夜(야)'와 '明(명)'은 개념상 반대이고 상극이다. '夜'가 있으면 '明'이 없고, '明'이 있으면 '夜'가 없다.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 함께 있으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새벽은 가능성이다. 영화의 대사에 나오듯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새벽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가능성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한국어 제목은 "새벽의 모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관객은 '가능성' 자리에 원하는 다른 단어를 집어넣을 수 있다.

영어 제목은, 원래 제목의 감성을 살리지 못했다. 새벽이 오기 전, 혹은 아침이 오기 전의 밤에 집중했다. 영어 제목(All the Long Nights)은 원작의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긴 밤'이라는 시간적 구속에 집중하는 느낌을 준다. 동시에 이 제목은 나름의 초점으로 영화의 주제를 드러낸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마주한 긴 시간은 일종의 '어둠'을 상징하며, 그 어둠은 각자에게 존재하는 고립감을 반영한다.

어둠을 겹친다고 어둠이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어둠이 겹쳐짐으로써 어쩌면 각자의 몫이 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하나의 어둠에 두 사람이 깃들였으니 그렇게 계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자처럼 각자의 어둠을 겹치려면 두 사람이, 두 사람의 고통이,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이 겹쳐져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에는 사건과 로맨스가 없는 것처럼 해답도 없다. 모든 미묘한 순간에서 빚어지는 소통의 부재와 힘겨운 소통의 개시를 통해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의미를 찾게 된다. 사건 없는 영화에서 스며 나오는 감성과 여운은, 관객에겐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다. 스크린 내의 사건 부재는 스크린 밖에서 실현된다. 보이지 않은 사건 내부의 본질적 사건에 다가갈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새벽의 모든>은 사건의 부재를 사건으로, 로맨스의 부재를 관계의 본질로 드러내며, '새벽'이라는 시간에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실은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관계

<새벽의 모든>은 눈에 보이는 로맨스나 극적인 사건 없이 남녀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미야케 쇼 감독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공유하며, 사랑이 아닌,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닌, 우정 혹은 그 이상의 특별한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이 영화는 남녀 관계에 관한 영화적 상투성을 탈피하며, 그들이 함께 겪는 고통과 고통의 공감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지평을 제시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대신 두 인물은 자신만의 고독과 불안 속에서 상대의 고독과 불안의 냄새를 맡고는 서로에게 다가간다. 삶에서 겪는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위로를 주고받는다. 표면적으로 우정이지만, 단순한 친구 이상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사랑과 우정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를 포착한 것에 이 영화의 성과가 있지는 않다. 연인과 친구 사이라는 수없이 반복된 남녀관계의 기존 틀이 아닌, 인간 사이의 공감과 유대를 말한다. 따라서 한 달에 한 번 월경전증후군(PMS) 때문에 짜증을 억제할 수 없게 되는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와 공황장애를 겪는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 사이에 인간적인 접촉만이 표현되도록 감독이 애를 썼다.

'고통의 공감'은 이 영화의 중심 테마다.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들이 함께하면서 각자의 고통이 비로소 서로의 언어로 번역된다. 말이 개입하지 않는 이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고 공감하기에, 로맨스의 등장이 오히려 거북할 수 있다. 사랑과 우정을 넘어서 인간적인 연대와 공감의 관계를 구축해 나간다.

<새벽의 모든>은 이처럼 전통적인 로맨스 영화나 사건 중심의 서사 구조와 다른 길을 택했다. 이해와 공감이 잔잔하게 영상언어로 그려진다. 해가 뜨기 전의 어둠이 가장 깊다고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가장 정직하게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극적인 만남과 아리는 이별이 없다. 새벽 전에 함께 경험한 어둠은 두 사람의 가슴에 나직하게 새겨진다.



▲ 영화 <새벽의 모든>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 '쿠리타 과학'으로 설정된다. 더 나은 직장을 다닐 수 있었지만, 가끔 분출하는 고통의 증상 때문에 기대치를 낮춰 이직한 곳이다.

영화에서 별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낭만적인 배경을 깔고 나온 게 아니라 '쿠리타 과학' 업무의 하나로 끼워 넣었다. 별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팀 버튼의 영화 <비틀쥬스> 시리즈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베텔게우스가 돋보이는 오브제가 된다.

영화에서 언급하듯, 또한 상식으로, 별의 빛은 우리에게 그 별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500광년 떨어진 베텔게우스의 빛이 지구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500년이다. 지구가 지금과 다른 상황일 때 예컨대 대항해시대 같은 때 그 별을 출발한 빛이 지금 도달한다. 본다는 행위는, 나아가 인식 전체가 과거를 바라보는 것임을 영화는 베텔게우스 일화로 상기한다.

인간 역시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시간의 지연을 포함해 과거의 흔적을 훑어가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과거의 경험, 기억, 선택이 현재의 우리를 형성하며, 우리가 살아낸 현재 또한 곧 과거로 변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그 현재는 이미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선택이나 행동의 결과를 당장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때가 많다. 베텔게우스의 빛처럼, 우리가 지금 내린 선택이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영화에서 반복해 말하듯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변화의 가능성이 고통을 감내할 힘을 줄지도 모르겠다. 극중 주인공이 내린 선택의 결과는 유보된다. 베텔게우스의 빛처럼 떠났으니 닿을 때까지 달릴 뿐이다.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 가능성이 핵심이다. 어디에 닿을지 모른 채 베텔게우스를 출발한 베텔게우스의 빛처럼 목적지가 어디든 달릴 뿐이다. 달릴 수 있어서 빛이며, 영화는 이런 빛의 감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세오 마이코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미야케 쇼 감독은 "한 쌍의 유니크한 남녀가 연애 이외의 방법으로 서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결과적으로 "한 쌍의 유니크한 남녀" 이야기를 넘어서 인간 실존과 공존에 관한 유니크한 통찰이 된 듯하다.

영화 제목이나 포스터뿐 아니라 실제 영화 전체에서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주제와 어울리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을 법하다. 고통이나 실존 같은 것들은 언제나 아날로그이니까.

안치용 영화평론가

▲ 영화 <새벽의 모든> 포스터 ⓒ (주)디오시네마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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