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상 최악'이 될지 모를 한일관계
[取중眞담] '한국 야당이 정권 잡았을 때' 우려하는 일본 신문을 읽고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윤석열 대통령이 6일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실을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 대통령실
이미 11번이나 만났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주말 서울에서 또 한 번의 정상회담을 했다. 퇴임을 불과 20일 앞둔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을 꼭 만나야겠다며 서울 찾는 걸 보니 한일관계가 정말 좋아진 건 맞는 것 같다.
문재인 시절엔 그렇게 만나자고 해도 무슨 '해결책'을 가져오라며 외면하던 일본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차분하게 살펴보면 과연 성과가 맞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제3국에서 상대국의 재외국민 대피를 서로 도운 것은 작년에 수단과 이스라엘 등에서 한 대로 하면 되고, 일본 입국 절차를 간소화하면 한국 여행객들이 편해지는 면도 있지만 그만큼 사람이 더 올 테니 일본 관광업계가 오히려 좋아할 일 아닌가. 우키시마호 피해자 명단도 그동안 없다고 잡아떼오다가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아주 일부만 선심 쓰듯 내놓았으니 유족들은 우롱당한 기분을 토로한다.
대신 언론이 관심을 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언급은 기시다 총리가 강제 징용에 대해 "저 자신은 당시 가혹한 환경 아래 많은 분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한 게 끝이다. 누가 누구에게 가한 고통과 슬픈 경험인지 '주어 없는 문장'인 데다, 일본 정부가 아닌 총리 개인의 소감이니 외교상으로도 별 의미 없는 발언이다.
사실 그간 윤석열 정부가 일본에 대해 취해온 태도로 볼 때, 이번 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획기적이고 진전된 발언을 할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제동원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 사도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문제 등 모든 현안에서 일본이 원하는 대로 들어줬으니, 과거사 문제라고 해서 일본에 뭘 요구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한일관계는 윤 정권의 성과가 아닌 약점일 수도 있다"라며 윤석열 정부의 역사문제 해결없는 한일관계 개선에 우려를 표했다. ⓒ 마이니치신문
배상금 지급할 강제동원 피해자는 계속 늘어나고
외교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이라는 상식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있는 현상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차에 정상회담이 열린 6일 저녁 일본 <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에 실린 쿠사카베 모토미 서울특파원의 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한일관계는 '성과'가 아닌 '약점'일 수도>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바로 "총리님과 함께 일궈온 성과들은 제가 취임한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는 윤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두발언, 그중에서도 '성과'라는 단어에 주목하며 자신이 한국에서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쿠사카베 기자는 아마도 윤 대통령이 말하는 최대의 성과일 이른바 '제3자변제' 이후에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당초 피해자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준비한 돈이 40억 원이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120억 원이나 초과됐다는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이 내야 할 돈을 한국 기업이 대신 내게 하는 방식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지난 2018년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강제동원 피해자 15명 가운데 4명은 일본 측의 사죄와 배상 참여가 없는 한 배상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어서 재단 측이 배상금 상당액을 법원에 공탁하려고 하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아 "새로운 법적 다툼으로 발전되고 있는" 딱한 현실도 꼬집었다.
한국 정부의 동의하에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지만,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전시물에 '강제노동'이란 말이 들어있지 않고 방문객들이 거의 오지 않는 장소에 설치한 것을 설명하느라 한국 정부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고도 전했다.
급기야 제1야당인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윤 정권의 대일 정책을 '굴종외교'로 비판하고 있으며, 민주당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사람을 공직에 앉히지 못하게 하는 특별법안까지 발의한 현실을 소개했다. 윤 대통령이 한일 간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성과'를 얘기하며 의기양양해 하고 있지만 어림없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오후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실로 들어오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정권을 차지한다면..."
그러면서 쿠사카베 기자는 "윤 정권의 지지율은 30% 밑으로 떨어져 있다"라며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정권을 차지한다면 대일 정책은 크게 변할 것이며, 그러면 해결되지 않은 한일 간 현안이 표면화되고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석열 정권이 인기가 없는 덕분에 야당이 차기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적지 않고 그럴 경우 최근 2년여 간의 밀월관계는 '뒤로 돌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한일 관계의 어두운 앞날을 우려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기 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고, 일본의 언론은 당시 한일관계를 '국교 정상화 이래 사상 최악'이라고 규정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으로서는 양국 정부가 맺은 멀쩡한 위안부 합의가 정권이 바뀌자 뒤집혔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 때 해결됐다고 생각한 강제동원 문제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국민의 마음'을 얻는 대신 '일본의 마음'만 얻어 역사 문제를 대충 봉합한 결과이다.
만약 차기 정권이 '제3자변제'를 없었던 것으로 해버리고 일본 전범기업들의 한국내 압류자산을 현금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일본이 다시 한국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비난하면서 양국 관계는 그야말로 '사상 최악'이 될 것이다.
백 보 양보해서, 현 정권 사람들이 주장하듯 일본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신 그만큼 가져오는 것이 있다고 하자. 그럼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받고 싶어 하는 피해자들의 피눈물은 무시해도 되는 건가. 일본 정부에도 당부한다. 과거사를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고 그냥 묻어놓고 가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본 정부에도 적어도 절반은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인 지난 6일 피해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나 이제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할머니는 8명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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