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꽤나 좋아한다. 처음 <지구 끝의 온실>을 읽었을 때는 영화 <이터널스>와 비슷한 시기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책과 영화가 이어지면서 사회운동 그보단 활동가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있다.
작년 가을, 김초엽 작가의 새 장편소설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편이라 장편소설이라는 것에 큰 기대감이 있었다. <파견자들>을 구매하기 위해 들렀던 지역의 동네책방 지기는 읽은 사람들 후기가 다 좋았다고 전해주어 나의 기대감은 더욱 상승했다.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던 <파견자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른 책도 골고루 읽어야 하는데 결국 그러지 못하고 소설의 진도가 쭉쭉 나갔다. 그림 한 점 없는 텍스트이고, SF 소설 특유의 설정들이나 과학적 이해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임에도 마치 영상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리듬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이 책은 소설 속 인물인 자스완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뻗어간 이야기이다.
인간들은 그들이 차지하며 살아가던 지상을 범람체로부터 빼앗기고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소설 속에도 나오듯 사실 처음부터 이 공간들은 범람체의 공간이었던 것이지만, 인간은 인간의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인간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지상과 지하에서 적대시되어 살아가던 범람체와 인간들이 나오는 이 책의 마지막은 흔히 누군가를 정복하고, 죽이고, 싸우는 장면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운 경계지역이 형성되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결합하고 얽혀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책은 끝났지만, 책 속 이야기는 어쩌면 이제 시작인 것이다.
지하 세계에서 인간들은 범람체에 노출되어 자아가 해체된 광증 발현자, 이른바 '미친'사람들을 '처리'한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특정한 기준 내에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오랜 시간 존재하지만 지워버린, 소외한 사회정치적 소수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차별이 아닌 평등을 이야기하며 싸우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특정 범람체들의 공간, 인간이 인간인 채로 범람체와 결합한, 범람체와 유기체가 되어 인간이지는 않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지상의 늪인들과 태린이나 선오와 같은 책 속 (주인공일) 인물들이 연결되면서 새로운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지상과 지하의 분열이나 적대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달라졌다. 공존하는 공간이 생겼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 균형은 완전하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지만,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소설 속 문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특히나, 인간의 사회 체계 구조와 달리 범람체는 누군가 통제하지 않고 위계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늪의 범람체들은 다른 지역의 범람체들을 하나하나 설득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공존하자고. 어쩐지 그 장면을 만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그 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해올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 온 지금 세계는 어떤가. 하나의 세계가 망가졌다면, 그 망가진 후라고 할 만한, 그러나 시간은 멈춤 없으니 언제나 '지금'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에게 남는 고민과 질문일 것이다.
당신의 '지금-여기'는 결코 당신 혼자일 수 없다. "가족, 친구, 지인 등 어떤 관계로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모든 공간들과 모든 생명들과 모든 물질들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상을 다녀온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던 이가 자스완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있냐고 물었을 때, 자스완이 미소 지으며 대답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기후위기 시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년 가을, 김초엽 작가의 새 장편소설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편이라 장편소설이라는 것에 큰 기대감이 있었다. <파견자들>을 구매하기 위해 들렀던 지역의 동네책방 지기는 읽은 사람들 후기가 다 좋았다고 전해주어 나의 기대감은 더욱 상승했다.
▲ 파견자들, 김초엽 (지은이) ⓒ 퍼블리온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던 <파견자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른 책도 골고루 읽어야 하는데 결국 그러지 못하고 소설의 진도가 쭉쭉 나갔다. 그림 한 점 없는 텍스트이고, SF 소설 특유의 설정들이나 과학적 이해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임에도 마치 영상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리듬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이 책은 소설 속 인물인 자스완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뻗어간 이야기이다.
인간들은 그들이 차지하며 살아가던 지상을 범람체로부터 빼앗기고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소설 속에도 나오듯 사실 처음부터 이 공간들은 범람체의 공간이었던 것이지만, 인간은 인간의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인간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지상과 지하에서 적대시되어 살아가던 범람체와 인간들이 나오는 이 책의 마지막은 흔히 누군가를 정복하고, 죽이고, 싸우는 장면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운 경계지역이 형성되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결합하고 얽혀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책은 끝났지만, 책 속 이야기는 어쩌면 이제 시작인 것이다.
지하 세계에서 인간들은 범람체에 노출되어 자아가 해체된 광증 발현자, 이른바 '미친'사람들을 '처리'한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특정한 기준 내에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오랜 시간 존재하지만 지워버린, 소외한 사회정치적 소수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차별이 아닌 평등을 이야기하며 싸우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특정 범람체들의 공간, 인간이 인간인 채로 범람체와 결합한, 범람체와 유기체가 되어 인간이지는 않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지상의 늪인들과 태린이나 선오와 같은 책 속 (주인공일) 인물들이 연결되면서 새로운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지상과 지하의 분열이나 적대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달라졌다. 공존하는 공간이 생겼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 균형은 완전하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지만,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소설 속 문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특히나, 인간의 사회 체계 구조와 달리 범람체는 누군가 통제하지 않고 위계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늪의 범람체들은 다른 지역의 범람체들을 하나하나 설득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공존하자고. 어쩐지 그 장면을 만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그 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해올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 온 지금 세계는 어떤가. 하나의 세계가 망가졌다면, 그 망가진 후라고 할 만한, 그러나 시간은 멈춤 없으니 언제나 '지금'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에게 남는 고민과 질문일 것이다.
당신의 '지금-여기'는 결코 당신 혼자일 수 없다. "가족, 친구, 지인 등 어떤 관계로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모든 공간들과 모든 생명들과 모든 물질들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상을 다녀온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던 이가 자스완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있냐고 물었을 때, 자스완이 미소 지으며 대답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기후위기 시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야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