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국민을 거지로 만든다? 조선 칼럼의 착각과 오류
[언론비평]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비판하려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 사례 억지 동원
▲ <조선일보> 9월 12일 자 김태훈 칼럼 "나라가 국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 조선일보
오늘(2024년 9월 12일 목요일)자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의 칼럼 <[태평로] "나라가 국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은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례를 들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25만원 법'(이 칼럼에서 이렇게 표현했으니 일단 이렇게 적어둔다)을 비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원유 매장량 1·2위를 다투는 나라 베네수엘라가 알짜배기 석유 회사를 국유화하고 거기서 나오는 돈을 국민 호주머니에 찔러주"었지만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례도 들었다.
"국민 40%에 이르는 사우디 빈민은 정부 지원금 덕에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고, "교육과 의료는 비록 질이 낮지만 무료"이며, "휘발유와 전기 등 에너지 가격은 거저나 마찬가지"이므로 "많은 사우디인은 땀 흘려 일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들(레바논인)이 일할 때 많은 사우디인이 집에서 빈둥거"린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결론은 이렇다.
"나라가 주는 현금에 길든 국민이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는 없"는데, "지금도 '25만원 법' 같은 것에 매달리는 걸 보면 현금 복지의 망령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으니 "그들이 멈추지 않으면 국민이 못 가게 막아야 한다"것.
정리해 보자.
요약하면,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례에서 보듯 '25만원 법'은 망국의 포퓰리즘 정책이며, 국민이 이 정책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
하지만 이 주장은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다. 어떻게 대한민국과 베네수엘라(혹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되는가.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는 인과관계를 설정하면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경우 범하는 오류다. 예를 들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면 온 나라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말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강재륜, <논리학> 中).
김태훈 논설위원은 '우리나라와 베네수엘라(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이 동일한가?'부터 따졌어야 한다.
2018년 8월 27일(월)자 한겨레 옥기원 기자의 <석유부국 베네수엘라 파탄이 '무상복지' 탓이라고요? [더(The)친절한 기자들]>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무분별한 포퓰리즘 때문에 망한 게 아니다.
기사에서 분석한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2010년대 이후 지속된 국제 유가 하락과 미국과의 갈등' 때문이다. 미국이 2013년을 전후해 베네수엘라에서 수입하는 석유량의 80%를 줄이는 경제 제재와 석유산업 이외에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소홀한 것이 패착이었다고 봤다.
김태훈 논설위원의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망국병'이라는 시각을 넉넉히 인정하더라도, 그 망국병이 우리나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국민에게 25만 원을 나눠주면 '나라가 주는 현금에 길'들여져 '국민이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는 없'어질까? '현금성 복지에 중독된 '사우디 병(病)'에 걸릴까? 과도한 복지와 산업의 비효율로 상징되는 '영국병'에 걸릴까?
극단적인 사례로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과정에서 기초적인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팩트도 틀렸다
심지어는 근거로 내세운 사실도 잘못됐다. 김태훈 논설위원은 25만원 법을 '현금 복지의 망령'이라고 비판했다.
3가지가 잘못됐다.
첫째, 25만 원은 현금 지급 방식이 아니다. 소비 쿠폰(지역화폐)이다. 즉, 일정 기한 내(법안 명시 기한은 4개월)에 못 쓰면 다시 국고로 회수된다. 현금처럼 회수 불가능하게 마구잡이로 살포하는 돈이 아니라는 뜻이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의원이 2024년 8월 1일(목) 국회 본회의장에서 분명하게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아래는 416회 국회 본회의 회의록에 나온 내용이다.
이 법률안은 소비를 촉진하여 경기를 진작시킴으로써 우리 민생을 돌보려는 것으로 전 국민에게 25만 원 이상, 35만 원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의 지역사랑상품권을 민생회복지원금으로 지급하는 내용입니다.
(중략)
민생회복지원금의 소비 진작 효과를 제고하기 위하여 지급된 상품권의 유효 기간을 원칙적으로 4개월로 하되 지역별 경기 동향과 소비 여건을 고려하여 시장·군수·구청장이 단축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반적인 지역사랑상품권과 달리 권면 금액의 일부만 사용하고 환급받는 특혜의 적용을 배제하는 내용을 반영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4개월조차도 길다고 판단하면 지자체장의 판단하에 유효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규정해놨다고도 설명했다.
둘째, 보편 복지가 아니라 선별 복지로 선회할 수도 있다는 점.
1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최고위원회의 발언을 보자.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민생회복지원금은 정부·여당이 노래 부르는 것처럼 현금 살포가 아닙니다. 무식한 것입니까,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것은 소비 쿠폰 아닙니까? 복지 정책이 아니고, 골목 경제, 지방 경제, 지역 경제 그리고 국민 민생을 실제로 살리는 현실적 재정경제 정책 아닙니까? 이런 재정경제 정책의 반사적 효과 이익을 모든 국민이 누려야 되고, 특히 세금 많이 내는, 부담 많이 하는 분들, 배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더불어민주당이 양보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보하겠습니다. 차등 지원 하십시오. 선별 지원 하세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것이라도 하십시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10.16재·보궐선거 공천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 유성호
김태훈 논설위원의 말처럼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안 하는 것보다 나으니 그것이라도 하자"고 딱 잘라 얘기했다. 우회전 깜빡이를 키면서 타협의 여지를 열어둔 것이다.
하지만 김태훈 논설위원의 칼럼은 단호했다. 해당 칼럼은 이 대표의 모두발언 하루 뒤인 오늘 게재됐다. 이 대표의 발언이 시간 상으로 분명히 앞섰기 때문에 사실상 야당 대표의 모두 발언까지 외면한 셈이다.
셋째, 이름도 틀렸다. 법안의 공식 명칭은 '25만원 법'이 아니라 '2024년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이다. 윤 의원의 말에 기반한다면, '25만 원 이상, 35만 원 이하 법(이지만 단축시킬 수도 있는)'이라고 해야 정당하지 않은가.
물론 도덕적이지도 못하다
이 칼럼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지만, 사우디 국민에게 "많은 사우디인이 집에서 빈둥거"린다며 국민성을 낮춰부르는 표현은 과도하다.
최소한 저 표현만큼은 수정됐어야 한다. 도덕이 딱 정해진 '절대법칙'과 같은 것이 아니라서 명확한 문제제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많은 사우디인은 땀 흘려 일하려 하지 않'고, '한 달 내내 출근하지 않아도 자를 수 없는데 월급은 꼬박꼬박' 받는 사람들이며, '. 축구를 제외하고는 '생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과도한 인신공격만큼은 바로잡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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