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자기 얼굴에 총 4발 쐈다니... 두황이가 초인인가요?

[사수만보] 군에서 의문사한 고려대 80학번 김두황을 위한 40여년 싸움 ①

등록|2024.09.16 10:53 수정|2024.09.16 10:54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내 친구 두황이가 22사단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6월 18일 밤 11시 35분에 죽었어요. 강원도 고성의 민간인 통제선 위쪽, 간첩 침투로를 감시하는 곳에서요. 그해 3월 18일에 군대에 끌려갔으니 불과 90일 만에 숨진 거죠.

김두황과 고려대 80학번 동기며 '겨레사랑회' 동아리 활동을 같이한 양창욱의 말이다. 입대 전 경제학과 4학년이던 김두황은 이날 끔찍한 주검이 되었다. 22사단 헌병대 발표에 따르면 김두황은 매복 초소에서 북쪽으로 7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자신의 총기 M-16(총번 209360)을 턱밑에 대고 4발을 잇달아 쏘았다. 총알은 머리를 관통해 김두황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루뼈가 두 쪽 나고 뇌는 거의 날아간 참혹한 모습으로.

두황이의 작은 형이 다음 날 새벽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헌병대는 유족을 마치 골칫거리가 될 사람들로 대했어요.

김두황의 작은 형 김두원은 6월 19일 01시 30분, 어둠을 찢는 전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집어든 수화기에서 "여기 군입니다. 두황이가 죽었습니다"라는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부모님 몰래 매형들에게 연락해 고성 현장으로 달려 갔다. 차마 쳐다볼 수 없는 동생의 참혹한 몸뚱아리,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는데 현장을 둘러싼 군인들은 "구타는 없었습니다. 자살입니다"를 되풀이 말했다. 또 "몸에 다른 상처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채근했다. 김두원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동생을 빨리 집으로 데려가고픈 마음 뿐이었다.

자신에게 M16 네 발을 쏘았다?

▲ 김두황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된 매복 초소. 사진 속 민간인은 김두황의 형과 매형이다.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22사단 헌병대 조사계는 화장에 동의한다는 사인도 요구했다. 김두원이 힘없이 이름을 적자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 자살 사건에 관해 현장 및 사체를 직접 확인한 결과 타살 혐의가 일절 없고 자살한 것으로 충분히 인정하고 차후 본 건에 대하여 민·형사상 일체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거니와 민원 역시 제기치 않겠기에 각서를 제출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22사단은 김두황의 죽음을 '골치 아픈 사건'으로 유족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존재'로 여겼을 뿐이다.

22사단 헌병대는 1983년 7월 9일 조사 결과를 발표했어요. 김두황은 자살했으며 "평소 내성적 성격… 소외감과 열등의식… 복무 중 염증을 느끼고" 등으로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군에서 의문사한 친구들의 사망 원인을 밝힐 때 한결같이 늘어놓는 말이죠.

양창욱이 말한 대로 군 수사기관은 군 의문사를 발표할 때마다 판박이였다. 1983년에만 강제징집 된 학생이 김두황을 포함 무려 다섯 명이나 죽었다. 성대생 이윤성이 5월 4일에, 한양대생 한영현이 7월 2일에, 동국대생 최온순이 8월 14일에 그리고 서울대생 한희철이 12월 11일에 숨졌다. 성대생 이윤성은 제대를 불과 열흘 남겨 놓고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한영현은 입대 후 김두황과 마찬가지로 불과 석 달 만에 숨졌다. 이 모든 주검에 군 수사기관은 '신병을 비관한 자살'로 몰아가고 '심약한 부적응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헌병대의 발표는 믿을 수 없어요. 유서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헌병대가 밝힌 자살 방식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 두황이가 초인인가요. 무엇보다 두황이는 씩씩하게 군대 생활을 하자고 저를 격려했거든요.

22사단 헌병대는 김두황이 '끝'이라는 유서를 지니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다. 헌병대는 김두황이 죽은 후 관물대를 뒤져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여기에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에> 실려있던 시 '끝'이 적혀있었다. 이는 김두황의 동기가 보낸 것으로 김두황의 글씨와 필체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김두황의 유서이고 야전잠바 오른쪽 위 호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것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지문감식과장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 출석해 통상 5일 걸리는 감정을 이틀 만에 했고 연구소는 헌병감실의 지휘를 받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조작했다고 실토했다. 김두황이 받은 편지를 유서로 둔갑시킨 것만으로도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가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자신에게 M16 네 발을 쏘았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총알이 잇달아 자기 머리를 관통하도록 방아쇠를 쥐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발만 머리에 맞아도 충격으로 몸이 튕겨 나가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런데 네 발이 머리를 뚫고 지나갈 때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는 건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이었다.

이 외에 사망 시각, 사망 장소 등 의혹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더욱이 김두황은 양창욱과 연대본부에서 헤어질 때 "군대도 현장이다. 반공웅변대회에도 나가서 우승해 포상 휴가를 나가자. 군대 생활을 버텨내자"라고 말했었다. 같은 소대원 중 하나인 신아무개 상병 또한 의문사위에 나와 "김두황이 회식 자리에서 탈춤을 잘 추었다"라며 그의 활기찬 모습을 전했다. 그런 김두황이 갑작스레 죽었으니 의혹은 클 수밖에 없었다.

고려대 학생 운동사에 중요한 발자취

▲ 22사단 55연대 2대대 시절의 김두황. 뒷줄 가운데가 김두황이다.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보안사가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대대로 떠나기 전, 두황이와 나는 연대본부에서 이틀간 보안반의 조사를 받았어요. 내가 3대대로 떠나고서도 두황이는 이틀을 더 조사받았죠. 자대로 배치되고 나서는 더 심했을 거예요. 두황이는 1983년 새롭게 구축된 고대 학생 운동의 지도부였어요.

양창욱의 말대로 김두황은 고려대 학생 운동사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입학해서 겨레사랑연구회에 들어간다. 이 동아리는 사회과학연구회, 기독학생회와 함께 연대하고 경쟁하면서 유신 치하에서 고려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김두황은 학내에서만이 아니라 제일교회에도 다니며 깊이 있는 사회과학 학습을 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제일교회를 비롯해 경동·연동·새문안교회 등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며 대학생 전사를 배출하는 기지 노릇을 했다.

겨레사랑회와 제일교회에서 단련된 김두황은 1981년 2학년 말이 되면서 "70년대부터 내려온 써클(동아리) 중심의 운동 방식을 벗어나자. 학생운동을 대중화해야 하는데 이 지름길은 학회 조직 활성화뿐이다"라며 새로운 조직 노선을 제안한다.

그의 의견에 80학번 동기의 호응이 컸다. 김두황이 앞장서 경제학과 내에 경제학회를 만들고 이어서 양창욱의 사회학과를 비롯해 중문과·교육학과·법학과와 경영대에서 학회가 결성된다. 그는 학교 당국과 싸워 문과대 건물 시계탑 7층에 학회 사무실까지 얻어냈다.

조직 노선의 이런 전환은 1982년 2학기 싸움에서 그 성과가 나타났다. 11월 4일과 5일 가을 축제 때 정경대 학생회가 '호안제', 문과대학생회가 '녹두제'라는 이름으로 학생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를 열었다. 4일에는 사회학과 김광경과 사학과 어미숙이, 5일에는 재료공학과 80학번 홍기원이 주동으로 나서 축제의 열기를 활용해 반 전두환 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이 사과탄까지 던질 정도로 이틀 동안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학회 조직 사업이 결실을 맺고 하반기 투쟁을 잘 치러내며 고대 80학번은 선배들의 지도나 지원 없이 김두황·김희근·박상중 3인으로 1983년 고대 학생을 이끌 지하 지도부를 결성한다. 김두황은 학회 사업을 총괄하게 되어 1983년 1월에 학회장 연합 모임을 만들고 4·18 마라톤대회와 5월 축제 투쟁 등 1학기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 1980년 입학해서 봄에 찍은 사진. 앞줄 두 번째가 김두황이다.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두황이가 비공개 지도부 및 학회장 연합 모임까지 이끄는 위치가 되면서 이래저래 눈길을 끌게 되었어요. 성북경찰서는 학교에 압력을 넣어 보직교수가 두황의 집까지 찾아가게끔 했어요. 두황의 부모님은 깜짝 놀랐지요. 등록금을 안 주며 활동을 막으려 하셨죠. 두황이는 어느 순간 서울시경에서도 주목을 받았어요.

성북서는 김두황이 학회 결성을 이끌며 학회 사무실까지 차지하자 그를 주시하고 주변을 탐문했다. 83년 들어서는 더 날카롭게 노려보았는데 김두황은 이런 압박 속에서도 81학번 예비 지도부에 대한 교육까지 맡아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여기에 참가했던 박래군은 세미나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고 김두황의 발제량이 엄청났다고 기억한다.

한편, 1982년 말부터 대학가에 '아방타방'이라는 소책자가 배포되는데 여기에는 '무림'과 '학림'에 대한 평가 그리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안이 담겨 있었다. 서울시경은 이 문건 작성자를 잡기 위해 '두더지'라는 작전명으로 '아방타방' 수사본부를 만들고 성북서·청량리서·관악서 등에 전담반을 편성했다. 서울대 등 9개 대학 41명이 수사 선상에 올랐고 제일교회 또한 문건의 생산지로 의심받았다. 제일교회의 리더 김헌은 서울시경에 연행되어 필적 감정을 받았는데 이 무렵 김두황 또한 용의선상에 올랐을 터이다.

3월 7일이 운명의 날이었어요. 학회장연합모임의 일원이던 한선모가 이날 새벽 들이닥친 성북서 형사 김OO에게 붙들려 갔죠. 어머니가 온몸으로 막았는데 형사가 어머니를 내팽개치고 끌고 갔어요. 나는 역촌동집에서 연행되고 두황이는 학교 앞에서 잡혔어요. 새로운 학회 지도부 중 세 명이 이날 잡혀간 거예요. 지하 모임과 공개 모임을 매개하던 두황이가 잡히고 고대 학생운동의 공개 지도부가 와해되었으니 이날은 고대 학생운동사에서 가슴 아픈 날이었어요.

▲ 김두황의 증명 사진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성북서는 3월 7일을 기점으로 학회장 연합 모임의 핵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 김두황·양창욱·한선모는 성북서 지하 보일러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 중 제일 먼저 연행된 한선모가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성북서 형사 이OO는 1학기 첫 시위 날짜와 주동자를 대라며 한선모의 뺨을 수십 대나 때렸다. 급기야 코피가 터져 한선모의 온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양창욱도 한선모에게 건넨, '아방타방' 문건의 입수 경위와 관련 심한 추궁을 받았다. 이날 성북서가 한꺼번에 핵심 운동가를 붙잡을 수 있었던 데는 사연이 있었다.

70년대 학번이던 어떤 복학생이 학회 활동에 관심이 많아 두황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때 대화 중에 나온 사람을 별명으로 메모했다. 한편 그 복학생은 자기 과의 후배 세미나를 지도했는데 '쿠바혁명사'를 교재로 택해 후배들에게 복사를 맡겼다. 그런데 복사집 주인이 성북서에 신고해 복학생이 연행되고 말았다.

이때 김두황과 대화하며 작성한 메모까지 압수되어 성북서 형사들은 별칭으로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그에게 물고문까지 자행했다. 당시 경찰이 학생 운동가를 폭행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대공분실이 아닌 일선 경찰서에서 물고문까지 서슴없이 벌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혹독하게 당해 결국 그 복학생의 입에서 80학번 핵심의 이름이 나오고 말았다. 성북서는 과녁을 좁힐 수 있었고 이날 기습 작전을 펼친 것이다(2002년 의문사위에 출석한 복학생은 통곡을 하며 '김두황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그날의 가슴 아픈 사연을 증언했다).

우리는 3월 7일부터 3월 18일까지 성북서 옆에 있던 미시간호텔에 갇혀 심문을 받았죠. 고대 학생 운동의 조직 상황 그리고 1학기 시위 계획에 대한 조사를 받았어요. 성북서는 이 사건(?)을 '고대 단대 간 학회 연합체 및 지하조직 81통일체 연계 1983년 1학기 시위 모의 사건'(일명 3·7사건)으로 규정했어요. 길고 거창한 이름이죠. 우리 셋에 대해선 지도 휴학 처리 후 입대라는 의견을 고려대에 보냈고 학교는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어요. 그날이 3월 16일이었는데 다음날인 3월 17일 병무청은 재빨리 현역 입영 명령서를 발부했죠.

양창욱·김두황·한선모가 체포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을 때 특이한 점은 성북서 근처 미시간호텔에서 조사받은 사실이다. 국가 기관이 사설 감옥을 운용한 셈인데 '학회장단 모임' 결성만으로는 아무래도 구속 영장을 받기 어려우니 이런 편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탈법·불법 조사가 진행되면서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열흘 가까운 심문과 고문으로 세 사람이 피폐해지고 특히 한선모가 정신분열 초기 증세까지 보일 때였다. 담당 형사 곽00이 느닷없이 술을 산다고 세 사람을 보문시장 근처에 있는 찻집 '영'으로 데려갔다. 말이 찻집이지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이었다. 그는 술이 거나해지자 옆 좌석에 있던 여자를 구석 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돌아왔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미시간으로 돌아올 때 곽00은 김두황과 양창욱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가요 '흔들리지 않게'를 선창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김두황이 군대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 "한두 시간이 있었다. 입영 전야에 말이다. 혼란에 봉착했었다"라고 쓰인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를 두고 한 말로 여겨진다. 담당 형사가 술에 취했을 때 도망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감정이 배어있다. 김두황과 양창욱, 한선모는 불시에 체포되어 열흘 가까이 폭력을 당한지라 '결단'을 내릴 여력이 없었다. 도망을 친다 해도 호주머니에 백 원짜리 하나 없고 당장 그날 밤 몸을 숨길 곳도 없었으니 말이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나오는 성북서 형사 김OO, 이OO, 곽OO의 행태는 고려대학교 재료공학과 80학번 홍기원이 쓴 <김두황 평전>(어나더북스, 2023)에서 더 많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성북서 형사들은 2002년 의문사위에 출석해 경찰관 재직 시 학생운동가를 폭행한 적이 없다며 고려대 출신 증언자들의 진술을 부인했다.

- ②편 <덤으로 얻은 삶, 내 친구 죽은 이유 밝힐 겁니다>(https://omn.kr/2a6dq)로 이어집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