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예산 500만원... 성교육은 78만원 없어 발 동동"
딥페이크 등 디지털성폭력 시대, 일선 교사·강사 목소리 들어보니... "정부 정책의 실패"
▲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서울 학부모회,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경기 학부모회, 서울혁신교육학부모네트워크,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서울지부 등 학부모 및 시민사회단체들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 및 근본적 종합대책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정민
"저는 교육의 힘을 믿어요. 학생들은 바뀔 준비가 돼 있고, 실제로 교육을 하면 바뀌어요. 그런데 회의감을 어디서 느끼냐면요, '위'에서 느껴요. 교육을 할 수 있게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교육이 문제라고 말해요."
이한 성평등 교육활동가는 1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난 2019년부터 남성 성평등 교육활동가로 학교 현장에서 디지털 성폭력 예방교육 등으로 다양한 학생들을 마주해왔다.
"뿌리 뽑자"는 대통령? 현장은 여전히 정체
가해자의 대다수가 10대인 텔레그램 내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27일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아야 한다"라고까지 말했으나, 학교 내 성교육 현장은 여전히 정체였다.
10년 넘게 학교에서 성교육을 진행해온 심에스더 성평등 교육활동가는 "원래 이런 사건이 보도되면 심각함을 인식하고 교육이 늘어나곤 하는데, 예산의 문제로 국가의 공공 사업 자체가 줄어들어 교육이 많이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최혜영 성평등 교육활동가 역시 "작년부터 활동이 거의 '반에 반토막'이 나 정말 사정이 어려워졌다. 주변에 물어보니 다들 사정이 비슷하다"라며 "여성가족부 예산이 축소됐고, 내가 강사로 위촉돼 활동하던 기관 중 두 군데가 사라졌다.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라고 전했다.
이한 활동가는 "이번 정권 들어서 계속 성교육에 대한 요청과 요구가 줄어왔다. 보통 사업이 2~3년 주기로 진행되는데, 정권이 바뀌기 전 진행됐던 사업이 3년이 되자 더는 재개되지 않는다"며 "교육이 줄어드니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문제가 터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2019년 N번방 사건 이후로 남자 청소년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진행되던 교육이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교육의 만족도도 높고 학교 선생님들도 지속가능성과 필요성을 이야기했음에도 올해 단 한 건도 하지 못했다"라면서 "개별 학교에서 문제가 터지니 부랴부랴 전화를 해 디지털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시냐고 묻는데, 이런 땜질식 일회성 교육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조차 되지 못한다"라고 전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여성가족부 예산 가운데 디지털 성범죄 교육 콘텐츠 제작 예산이 2021년부터 매해 9억 9600만 원 규모로 편성돼왔지만 올해 전액 삭감, 아동·청소년 대상 '성 인권 교육' 예산도 일부 삭감됐다.
"교육청 공문, 교육하라면서 자료 없어"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희영 위원장과 교사들이 8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학교 불법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유성호
현재 교육부 고시에는 모든 초·중·고교에서 1년에 15시간씩 의무적으로 성교육을 하게 돼 있으나 활동가들은 그나마도 형식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심에스더 활동가는 "강사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혼자 학교 방송실에 들어가 얼굴도 마주보지 않은 상태로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방송 교육'이 절반 이상"이라면서, "대부분의 강사가 이런 교육을 꺼려하지만, 그래도 안 듣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교육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가닿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의 교육이 줄거나 이뤄지고 있지 않은 대신 사교육에 대한 의뢰가 부쩍 늘었다"며 "남성 청소년 양육자 역시 우려를 갖고 많이들 신청하곤 한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나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소중한 동료 시민이고, 나의 성적인 즐거움과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그냥 몸뚱이나 도구가 아니라는 걸 계속 알려줘야 문제가 해결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심에스더 활동가
이들은 형식만이 아닌 내용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혜영 활동가는 "위촉된 기관에서 제공된 교안을 받을 때마다 퇴보하는 느낌을 받는다.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성평등'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양성평등'만을 고집한 건 분명한 실패"라면서 "매체에 대한 흡수력이 빠른 '미디어 세대'에게 교육을 진행하면서 해야 할 말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제대로 대화하고 있나"라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의 고충 또한 심각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 김아무개씨는 지난해 학내에서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뒤 후속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벽에 부딪혔다. '스쿨 폴리스' 제도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 경험한 김씨는 이후 성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나, "성적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학 직전에 성교육 강사를 섭외해 방송 교육이나 일회성 교육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교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절실하게 듣고 싶다"라며 "또한 학생들도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듣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통로도 시간도 많지 않다"라고 전했다.
"교육하면 바뀐다"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딥페이크 성폭력이 보도되고 교육청에서 이에 대해 교육하라고 공문이 내려왔는데, 정작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료가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기력감을 느꼈다"라며 "자료가 없이 내려오면서 무조건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는 공문도 그저 학교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사는 정부 대신 성교육에 관심이 많은 다른 교사들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등의 자료를 통해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관계나 사회성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요소를 다룬 '포괄적 성교육'이 교육 과정 안에 들어와야 한다"라면서 "코딩이나 AI의 경우 한 반에 500만 원 정도로 예산이 배정되는 반면, 성평등 교육은 78만 원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른다"라고 설명했다.
교사와 강사들은 입을 모아 "제대로 교육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한 활동가는 "기존에 (페미니즘 등에) 반감을 보이던 남자 청소년들 역시 3~4차시 정도의 교육만으로도 내게 다가와 '오해가 풀리거나 관심이 생겼다'고 말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남자 중학교에서는 다양한 교과의 선생님들이 뭉쳐 성평등을 주제로 한 학기 동안 이야기를 해왔고, 그 학교에서 정말 다른 남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라면서 "교육할 수 있게 예산이나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교육이 문제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바뀔 준비가 돼 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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