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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윤한샘의 맥주실록] 맥주잔의 역사와 의미

등록|2024.09.20 11:58 수정|2024.09.30 08:45

▲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의 <여관에 있는 세 명의 농부들> ⓒ wikiart


세 명의 농부가 있다. 오른쪽 남자 품에 있는 악기는 작은 바이올린이다. 담배 파이프를 쥔 남성과 술잔을 든 젊은 남성은 바이올린 연주에 흥이 잔뜩 돋은 모습이다. 허름한 술집, 작은 테이블, 남루한 행색이지만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의 1647년 작 <여관에 있는 세 명의 농부들>(Three peasant at an inn)은 바로크풍의 풍속화다. 그는 평민들의 일상을 현실적이고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젊은 남자가 마시고 있는 술은 무엇일까? 맥주다. 와인이나 진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손에 있는 잔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술이 아니라 잔에 있다. 만약 잔의 재질이 유리가 아니라 도자기나 주석이었더라도 술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까?

다음 그림을 보자. 역시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의 1653년 작 <나이 든 여인을 꼬시고 있는 농부>(A peasant courting an elderly woman)다. 저 여인은 술집 주인이 분명하다. 자신의 손을 지긋이 잡고 은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가 싫지 않은 모양이다.

▲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의 <나이 든 여인을 꼬시고 있는 농부> ⓒ wikiart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남자 손에 들린 잔은 상관있다. 기다란 실린더 모양, 넘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넓은 바닥 그리고 일정한 선을 가진 이 잔은 영락없는 필스너 글라스다. 잔만 봐도 그가 마시는 술이 와인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두 그림 모두 17세기 네덜란드 평범한 농부들이 유리잔에 맥주를 마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유리 재질 맥주잔은 당시 유럽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사용하던 사치품이었다. 유리 맥주잔이 보편화된 시기는 산업혁명이 지난 19세기다. 도대체 네덜란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8000년 전,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 맥주잔의 출발을 되짚어봐야 한다.

최초의 맥주잔

▲ 이라크 테페 가우라에서 출토된 술 잔 ⓒ Pennmuseum


고대 메소포타미아 맥주는 지금과 달랐다. 빵을 발효시켜 만든 맥주는 곡물 껍질이나 걸쭉한 찌꺼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갈대 빨대로 함께 마셨다. 현재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가장 오래된 잔은 이라크 테페 가우라(Tepe Gawra)에서 발견됐다.

기원전 6500년부터 1500년까지 정착했던 곳으로 보이는 테페 가우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강 우측에 존재했다. 20세기 초 이곳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잔이 출토되었다. 작은 손잡이가 달린 이 잔은 맥주뿐만 아니라 와인까지 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족들의 제사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500년에 발명되었다. 규사, 소다회, 석회석을 녹여 만든 유리는 고온의 불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미 불로 벽돌을 구워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던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유리는 우연한 발명품이자 위대한 유산이었다.

초기 유리는 장식품이나 장신구로 사용됐다. 유리를 용기로 발전시킨 곳은 기원전 1500여 년 고대 이집트였다. 이들은 고온에 녹은 유리를 점토나 모래 틀에 넣어 아름다운 잔과 그릇으로 탄생시켰다. 물론 유리 용기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왕족에게나 허용된 최고급 사치품이었다.

술잔을 예술로 승화시킨 로마

잔은 술의 행보를 따라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맥주와 와인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미케네로, 그리고 그리스와 유럽 대륙으로 흘러 들어갔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뿌리였던 미케네를 보면 술잔의 진화를 그려볼 수 있다.

▲ 미케네 킬릭스 ⓒ 윤한샘


킬릭스(kylix)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잔은 기원전 1300년경 미케네에서 제작되었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렸고 다리와 받침이 있는 형태로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고블릿(goblet)이라 불리는 잔이 바로 킬릭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케네 문명에는 킬릭스 외에 다양한 형태의 술잔이 있었다. 단순한 원통 형태부터 작은 고블릿이 연결된 형태까지 이 잔들은 아마 와인뿐만 아니라 맥주에 두루두루 사용되었을 것이다.

문명의 힘이 이집트에서 지중해로 넘어가면서 맥주는 와인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언덕이 많고 토지가 척박했던 그리스는 곡물 대신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했다. 그리스가 번성할수록 디오니시스는 머리에 포도를 주렁주렁 달고 와인이 문명의 술임을 천명했다.

▲ 디오니시스가 세 명의 신들이 새겨진 술잔을 들고 있다 ⓒ 윤한샘


로마 시대로 들어서며 잔은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 로마는 이집트에 물려받은 유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녹은 유리를 입으로 불어 형상을 만드는 '유리 불기' 기술이 이때 완성됐다. 금, 은, 도자기, 유리까지 제국이 커져 갈수록 와인잔은 다채로운 형태를 뽐내며 예술이 되어갔다.

야만족, 맥주의 시대를 열다

맥주가 천대받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맥주잔의 발전도 멈췄다. 유럽 대륙으로 넘어간 맥주는 북쪽 야만족들의 술이 됐다. 문명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단순한 그릇 모양의 토기에 맥주를 마셨다.

시간이 흐르며 토기를 대체한 것은 나무였다. 안쪽을 밀랍으로 채운 나무잔은 가볍고 다루기 수월했다. 손잡이도 달렸다. 탱커드(tankard) 또는 비어머그(beer mug)라는 장르가 여기서 출발했다.

▲ 나무로 만든 탱커드 ⓒ 위키피디아


서기 476년 와인 제국에 멸시받던 야만족들이 유럽의 주인이 된다. 맥주 민족 게르만이 와인 나라 서로마를 무너뜨린 것이다. 비대해진 로마는 서기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진 상태였다.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 로마의 추는 이미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9세기 새로운 서로마 황제의 관을 쓴 샤를마뉴 대왕이 나타나기 전, 초기 중세는 혼돈의 시대였다. 게르만족들이 기독교 중심으로 유럽을 재편하면서 맥주는 민중들의 일상을 책임지는 술이 된다. 맥주잔도 다양한 재질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 연금술이 발전은 금속 맥주잔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여기에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이 컸다. 이슬람 제국은 동로마와 교류를 바탕으로 수학과 화학에서 큰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유리 기술도 이때 전수됐다. 동로마 유리 기술은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와 8세기부터 고도로 발전했다. 실크로드와 한자동맹은 아름다운 이슬람 유리를 중국과 인도 그리고 유럽 곳곳으로 퍼트렸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문명과 기술은 중세 유럽 장인들을 자극했다. 이슬람의 연금술과 유리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곳은 이태리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 장인들은 12세기부터 독특하고 정교한 유리 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유리가 맥주잔의 중심으로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유리잔은 한참 동안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

맥주잔, 예술에 다가가다

르네상스 이후 맥주잔에도 와인잔 못지않은 정교한 문양이 깃들기 시작했다. 세라믹 재질 맥주잔은 다루기 쉬웠으나 단순하고 투박했다. 맥주잔에 화려함을 제공한 건 금, 은, 주석 같은 금속이었다. 금속을 정교하게 다루는 기술은 길드에 들어가기 위한 척도가 되기도 했다. 그중, 가격이 저렴하고 가공이 쉬운 주석이 중요한 재료로 떠올랐다. 파리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소문이 맥주잔에 주석 뚜껑을 선물했다.

16세기 들어서야 유리 맥주잔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주목을 받았다. 한 세기 전 베네치아 장인들이 개발한 크리스털 유리가 큰 역할을 했다. 맥주를 좋아했던 독일 귀족들은 투명한 잔 표면에 가문의 문양이나 상징을 그리면서 자부심을 드러냈다.

유리 불기와 접합 기술의 발달은 탱커드 모양의 단순한 맥주잔을 비커, 플루트, 고블릿, 성배 모양으로 탈바꿈시켰다. 다소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맥주잔도 조금씩 예술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패스 글라스. 선을 따라 세례받는 장면이 그려있다 ⓒ 윤한샘


1662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작된 패스 글라스가 좋은 예다. 이 잔에는 막시밀리안 이마누엘이라는 귀족의 세례 모습이 다섯 개의 선을 따라 묘사되고 있다. 맥주를 마실 때마다 드러나는 가문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핸드폰이 없던 시절, 이 맥주잔은 화려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도구였을 것이다.

맥주잔, 문화와 정체성이 되다

17세기 중반, 유리 맥주잔은 조금씩 대중화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트렌드를 이끌었다. 배경에는 산업혁명과 맥주 색의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 시대, 맥주는 밝은색을 입었다. 할스가 발명한 코크(coak) 가마는 맥아를 이전보다 옅게 만들었다. 까만색이었던 맥주가 페일 에일(pale ale)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색은 자연스레 맥주의 또 다른 즐길 거리가 됐다. 자본은 취향을 따라가는 법. 사람들이 맥주 색을 온전히 보여주는 유리잔을 원할수록 돈이 흘러 들어갔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와 산업혁명으로 최초의 공업국가가 된 영국이 선구자였다. 아드리안 반 오스테드 그림 속 농부들이 상류층들의 소유물이었던 유리잔에 맥주를 마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마이센을 중심으로 도자기 기술이 크게 성장했다. 슈타인 글라스라고 불리는 세라믹 재질의 탱커드가 독일 맥주 문화의 중심이 됐다. 하지만 19세기 황금색 라거가 등장은 유리잔을 맥주의 영원한 동반자로 묶어버렸다.

▲ 에두아르 마네의 <카페 콩세르>. 사람들이 유리로 만든 탱커드 혹은 비어 머그에 황금색 맥주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맥주잔은 향미를 넘어 문화 정체성을 담는 그릇이 되고 있다. 우리는 맥주잔만 봐도 어떤 맥주를 마시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바이스비어, 영국 페일 에일, 옥토버페스트 맥주, 트라피스트 에일, 도펠복 등, 전용 잔을 가진 맥주들은 잔도 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21세기 크래프트 맥주 시대로 접어들며 맥주잔은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손 위에 어떤 맥주잔이 들려있는가. 어쩌면 그 맥주잔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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