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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전후에 피체, 1년 이상 고문을 당했다

[오늘의 독립운동가 3] 2012년 9월 19일 타계한 서상태, 김명기 지사

등록|2024.09.19 14:28 수정|2024.09.19 14:28

▲ 서상태 지사와, 그가 입학하려 했던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 의대)의 1930년대 모습 ⓒ 국가보훈부, 대구근대역사관

서상태(徐相台) 지사는 1924년 2월 11일 대구 검단동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고, 후쿠오카현(福岡縣) 기타규슈시(北九州市) 도바타(戶畑) 중학을 졸업했다. 중학교 재학 중 3명의 동지들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흥맹회(興氓會)를 결성했다.

중학교 졸업 직후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 의대)에 입학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의전 입시와 관련해 잠시 귀국했을 때도 대원영길(大原榮吉)을 흥맹회에 가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공장 견습공 백천박순(白川博淳) 등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에 힘썼다.

"태평양전쟁이 진행되면서 버마와 필리핀의 독립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 국가들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니 우리 한국이 먼저 독립하는 당연하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계속되고 있다. 중국 정치가 저우포하이(周佛海)가 지은 『삼민주의해설(三民主義解說)』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행복은 한국이 독립국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지하활동을 계속하던 중 1943년 여름 일제경찰에 포착되어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는 중국 망명을 도모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1944년 4월 붙잡히고 말았다. 1944년 10월 18일 일제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했다.

"조선인의 행복은 독립을 되찾아야만 가능"

김명기(金明起) 지사는 1920년 6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20세이던 1941년 4월 이후 도쿄 고쿄쿠샤 고등공학교(攻玉社高等工學校) 토목과 야간부에서 공부하는 한편 낮에는 동경시 항만국 축항과 매립계에 용인으로 일했다.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 동급생들과 어울려 민족문제와 독립방안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이들은 "내선일체는 허구다. 졸업한 뒤 귀국하면 한국인만의 회사를 설립해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교원이 되어 청소년들을 훌륭히 육성하는 한편 한국어를 널리 보급해 민족의식이 굳건히 유지되도록 힘써야 한다." 등의 항일논리를 조선인 학생들에게 전파했다.

지사는 3세 연상의 동급생 김좌목(金佐穆)을 비롯해 임우철(林優喆), 김응춘(金應春)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던 중 1942년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2월 4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을 적용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미결수를 1년 동안 고문한 뒤 징역 1년 언도

평양 출신으로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한 김명기 지사가 전주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것은 동지 김좌목 지사가 김제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김좌목 지사가 압송될 때 함께 끌려갔는데, 무려 1년 동안 미결수로 있었다.

1942년 12월 피체와 1943년 12월 선고 사이에는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그 동안 일제는 악랄한 고문을 줄기차게 실시했다. 김좌목 지사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 생활 9개월째인 1943년 8월 14일 사망했다. 김명기 지사는 목숨은 지탱했지만, 징역 1년을 언도받을 때 이미 구속 기간이 1년을 넘었으므로 일제는 집행유예 3년을 덧붙여서 풀어주었다.

▲ 김명기 지사(왼쪽), 김명기 지사 판결문, 김명기 지사와 일본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8개월 만에 고문으로 순국한 김좌목 지사 ⓒ 국가보훈부

같은 날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들의 인연이 애달프다

김명기 지사는 2012년 9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서상태 지사도 2012년 9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일본에서 같은 1940년대에 독립운동을 했지만 600km이상 떨어진 도쿄와 후쿠오마에서 각각 활동했으므로 당시에 서로 알고 지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조국독립 이후에는 광복회에서 만났을 수도 있으리라.

두 분이 같은 날 타계하셨으니 각각의 부음이 서울의 광복회로 전달된 시각도 대략 동시였으리라. 또는 두 집안이 서로에게 부고를 보냈으리라. 죽마고우 현진건과 이상화 두 민족문학가가 1943년 4월 25일 같은 날 세상을 떠나 서로의 집안으로 부고를 보낸 일이 떠오른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지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1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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