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곳간이 위태롭다, 윤석열 대통령이 봐야 할 드라마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티빙 <우씨왕후>
나라 곳간이 위태해지고 있다.
지난 19일 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2~2026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5년간 증발하게 될 세수가 284조 원으로, 연간 57조 원 규모의 세수가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부자감세가 꼽힌다.
지금 추진되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나 상속세 인하도 그런 기조의 산물이다. 재정이 위태한 상황에서도 부자증세를 꺼리고, 상황이 더 다급해지면 서민을 쥐어짜는 악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권이 얼마나 많은 민란을 자초했는지는 역사서에 수도 없이 기록돼 있다.
을파소의 '진대법'
티빙 사극 <우씨왕후>의 고국천태왕(고국천왕)과 재상 을파소를 보니 지금 상황이 더 답답하기만 하다. 재정이 열악해지면 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진다.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실시한 진대법 같은 개혁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봄·여름·가을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겨울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개혁이다. <우씨왕후> 제1회에서 귀족 대신들이 고국천태왕의 부재를 틈타 을파소를 압박하고 진대법을 무산시키려 하는 장면에서 보듯이, 이 조치는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진대법은 서민층을 위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지만, 귀족층의 이익을 과감히 억누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개혁은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봄부터 곡식을 빌려주고 겨울에 돌려받으려면 국가의 재정 여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노동력의 국경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왕조국가 시대에는 노동력과 토지를 늘려 세수를 증대하는 방편으로 전쟁을 자주 활용했다. 왕조국가들은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이런 전쟁에 대비해 비상금을 두둑이 갖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대법까지 실시하려면 나라 곳간이 상당히 풍족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시사하는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 고국천왕 편은 진대법 시행 4년 전인 190년에 좌가려의 난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외척 반란인 이 난이 일어나 고구려가 들썩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대법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반란은 이듬해에 진압됐다. 이런 사건 뒤에는 의례적으로 몰수 처분이 뒤따랐다. 반란 주역들이 보유했던 노비와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로 이관되는 일이 뒤따랐다. 고구려본기는 승자인 고국천태왕이 확보했을 몰수 자산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자료들을 보여준다.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태왕이 그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태왕이 그렇게 한 것은 좌가려 일파가 외척의 권세를 믿고 국정을 농단할 뿐 아니라 "남의 자녀와 남의 전택을 약탈해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고구려본기는 알려준다.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국인'을 우리 시대의 한자 용례에 따라 '나라 사람들'로 번역한 서적들이 많지만, 국인은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도성 사람들'을 의미할 때도 많았다. 고대에는 '국'이 도성의 의미로도 쓰였다. 그런 시절에 국인은 도성에 거주하는 지배층을 의미할 때가 많았다.
남성 후계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됐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은,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선덕여왕이 나라 백성들의 민주적 추대로 왕이 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라벌에 사는 신라 지배층의 지지로 즉위했다는 의미다.
좌가려 일파의 약탈에 대해 국인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비와 토지를 탈취했는지를 시사한다. 일반 민중이 분개한 게 아니라 지배층이 분개했다는 것은 약탈 규모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연나부 내의 4개 그룹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이들의 군대가 도성을 공격했다고 알려준다. 연나부를 주도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도성 공격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이들이 보유한 경제력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좌가려 일파의 경제력은 반란 진압 뒤에 태왕의 소유로 몰수될 수밖에 없었다. 난이 진압된 직후에 태왕이 귀족 가문에 휘둘리지 않는 실력주의 인재 등용을 천명하면서 을파소라는 농민을 재상으로 전격 발탁한 것은 귀족들의 기가 꺾인 당시의 분위기와 연관된다.
'부자 몰수'로 성사된 진대법
좌가려의 난을 진압하고 4년 뒤에 고국천태왕은 진대법이라는 개혁을 시행했다. 진대법의 재원이 어디서 나왔겠는지를 이로써 추론해볼 수 있다. 바로 '부자 몰수'의 방법이다. 진대법은 그 뒤 역대 왕조에 계승돼 조선시대의 환곡제도로까지 이어졌다.
2017년에 <국학연구논총> 제20집에 실린 신정훈 초당대 교수의 논문 '고구려 진대법의 추이와 의미'에는 "진대법의 재원이 될 만한 것은 이들에게서 몰수된 재원이었을 것"이라며 "외척과 4연나의 재산이 고국천왕 16년에 시행된 진대법의 주요한 자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국천태왕이 설득의 리더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재원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진대법은 역사에 등장하기 힘들었다. 을파소는 개혁 의지는 있었지만, 구체적 수단은 별로 없었다. 수구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기에 진대법이라는 역사적인 개혁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자. 윤 대통령이 부자감세 기조에 손을 대지 않고서는 지금의 수렁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역사상 획기적인 대개혁인 진대법도 일종의 부자 증세를 기반으로 성사됐다. 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19일 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2~2026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5년간 증발하게 될 세수가 284조 원으로, 연간 57조 원 규모의 세수가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부자감세가 꼽힌다.
을파소의 '진대법'
▲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티빙 사극 <우씨왕후>의 고국천태왕(고국천왕)과 재상 을파소를 보니 지금 상황이 더 답답하기만 하다. 재정이 열악해지면 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진다.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실시한 진대법 같은 개혁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봄·여름·가을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겨울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개혁이다. <우씨왕후> 제1회에서 귀족 대신들이 고국천태왕의 부재를 틈타 을파소를 압박하고 진대법을 무산시키려 하는 장면에서 보듯이, 이 조치는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진대법은 서민층을 위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지만, 귀족층의 이익을 과감히 억누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개혁은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봄부터 곡식을 빌려주고 겨울에 돌려받으려면 국가의 재정 여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노동력의 국경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왕조국가 시대에는 노동력과 토지를 늘려 세수를 증대하는 방편으로 전쟁을 자주 활용했다. 왕조국가들은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이런 전쟁에 대비해 비상금을 두둑이 갖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대법까지 실시하려면 나라 곳간이 상당히 풍족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시사하는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 고국천왕 편은 진대법 시행 4년 전인 190년에 좌가려의 난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외척 반란인 이 난이 일어나 고구려가 들썩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대법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반란은 이듬해에 진압됐다. 이런 사건 뒤에는 의례적으로 몰수 처분이 뒤따랐다. 반란 주역들이 보유했던 노비와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로 이관되는 일이 뒤따랐다. 고구려본기는 승자인 고국천태왕이 확보했을 몰수 자산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자료들을 보여준다.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태왕이 그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태왕이 그렇게 한 것은 좌가려 일파가 외척의 권세를 믿고 국정을 농단할 뿐 아니라 "남의 자녀와 남의 전택을 약탈해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고구려본기는 알려준다.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국인'을 우리 시대의 한자 용례에 따라 '나라 사람들'로 번역한 서적들이 많지만, 국인은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도성 사람들'을 의미할 때도 많았다. 고대에는 '국'이 도성의 의미로도 쓰였다. 그런 시절에 국인은 도성에 거주하는 지배층을 의미할 때가 많았다.
남성 후계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됐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은,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선덕여왕이 나라 백성들의 민주적 추대로 왕이 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라벌에 사는 신라 지배층의 지지로 즉위했다는 의미다.
좌가려 일파의 약탈에 대해 국인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비와 토지를 탈취했는지를 시사한다. 일반 민중이 분개한 게 아니라 지배층이 분개했다는 것은 약탈 규모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연나부 내의 4개 그룹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이들의 군대가 도성을 공격했다고 알려준다. 연나부를 주도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도성 공격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이들이 보유한 경제력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좌가려 일파의 경제력은 반란 진압 뒤에 태왕의 소유로 몰수될 수밖에 없었다. 난이 진압된 직후에 태왕이 귀족 가문에 휘둘리지 않는 실력주의 인재 등용을 천명하면서 을파소라는 농민을 재상으로 전격 발탁한 것은 귀족들의 기가 꺾인 당시의 분위기와 연관된다.
'부자 몰수'로 성사된 진대법
▲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좌가려의 난을 진압하고 4년 뒤에 고국천태왕은 진대법이라는 개혁을 시행했다. 진대법의 재원이 어디서 나왔겠는지를 이로써 추론해볼 수 있다. 바로 '부자 몰수'의 방법이다. 진대법은 그 뒤 역대 왕조에 계승돼 조선시대의 환곡제도로까지 이어졌다.
2017년에 <국학연구논총> 제20집에 실린 신정훈 초당대 교수의 논문 '고구려 진대법의 추이와 의미'에는 "진대법의 재원이 될 만한 것은 이들에게서 몰수된 재원이었을 것"이라며 "외척과 4연나의 재산이 고국천왕 16년에 시행된 진대법의 주요한 자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국천태왕이 설득의 리더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재원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진대법은 역사에 등장하기 힘들었다. 을파소는 개혁 의지는 있었지만, 구체적 수단은 별로 없었다. 수구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기에 진대법이라는 역사적인 개혁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자. 윤 대통령이 부자감세 기조에 손을 대지 않고서는 지금의 수렁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역사상 획기적인 대개혁인 진대법도 일종의 부자 증세를 기반으로 성사됐다. 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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