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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9] <시름>에서 시대적 아픈 심경을 담았다

등록|2024.09.22 17:21 수정|2024.09.22 17:21

▲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가람은 1940년 50세가 되었다.

1940년대는 숙원이었던 민족해방의 연대이지만, 이에 앞서 그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된 것이다. 해방 직전 가장 어둠이 짙었던 시기,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일제의 폭압 속에 마지막 민족주의 인사들 중 대부분이 훼절하였다. 그들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1940년 1월, 신석정 시집 <한야보(寒夜譜)>를 <문장>지에 추천했다.

5월 조선어학회의 '철자법 추가개정안'에 관해 토의하고, 동아일보사 모집 시조작품 심사, 7월 아악부에서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5월 <진단학보> 회원들과 강화도를 여행하고, 10월 경복중학교 습자 강사로 나갔다.

1941년 3월 최승희 무용발표회 참관, 4월 아악부 강사 촉탁사령장을 받고, 11월 덕수공립상업학교 습자시간(주 6시간) 강사를 맡았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국민징용령 등으로 관공서는 물론 모든 학교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는 등 시국이 극단으로 어려워져갔다. 이즈음에 지은 <시름>에서 시대적 아픈 심경을 담았다.

시름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가랴 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 꾸리 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 버리고 눈물 마저 마르겠다

쌀쌀한 되 바람이 이따금 불러온다
실날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어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주석 1)

일제는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조선어학회에 독침을 찔렀다. 1942년 10월 1일을 기해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 33명을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아 구속했다. 10월 22일 가람도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혀서 흥원형무소에 갇혔다.

그 전후의 사정을 본인의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소위 대동아전쟁이 벌어지며 일정은 더욱 가혹하여 창씨·신사참배 미소짓기·일어상용·공출·피공출 등등으로 달달 볶았는데 내가 맡았던 조선어는 폐지되어 습자 몇 시간을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며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창씨는 아니 하였을망정 다른 건 다 남처럼 하였다.

나는 교사로 늙으며 그럭저럭 52세 이해 가을에 조선어학회가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라 하여 어학회 회원 이름이나 좀 일컫는 이는 모두 홍원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나도 그 한몫에 끼었다. 홍원서 한 돌이 되자, 함흥감옥까지 갔었다. 1년을 두고 취조 받기란 세상에 못할 노릇이다. 당하는 우리보다는 취조하는 그들이 더 징글징글하다. 악마나 독사도 한때 뿐이지 그렇게 오래오래 짓이길 수 있으랴. 그래도 홍원서 3십여 명 가운데 하나 죽은 이가 없는 건 기적이었다. 반수 쯤은 그냥 갇혀 있다가 둘이 죽고 해방이 되어 다 나왔다.

나는 돌을 지나 서울로 오니 적벽강산이다. 아우는 시골서 와 기다리고, 8순되신 아버지께서 강건하시고 내 방의 책이며 몇 분 난초가 남아 있는 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던 것이었다. (주석 2)

일제가 가람 등 조선어학회사건 33인의 유죄판결의 주문(판결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의도를 명확히 꿰고 있었다.

민족운동의 한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를 지닌 민족독립운동의 점진 형태이다.

생각건대 언어는 사람의 지적·정신적인 것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사람의 의사·감정을 표현하는 이에 그 특성도 표현하는 것이므로, 민족 고유의 언어는 민족 안에서 의사소통은 물론 민족감정 및 민족의식을 빚어내어 이에 굳건한 민족결합을 성취시키고 그것을 기록하는 민족 고유의 글자가 있어서 이에 민족문화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나아가서 민족적 특징은 그 어문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파생시키고 향상·발전 시키며, 그 고유문화에 대한 과시와 애착은 민족적 우월감을 생기게 하고 그 단결을 일층 공고하게 하여 그 민족은 활발하게 발전하게 된다. (주석 3)

일제의 혹독한 신문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모진 고문으로 회원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하였다. 저들은 거짓 자백서를 받아내고자 난장질·물먹이기·비행기태우기 등 온갖 고문을 동원했다.

비행기 태우기란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목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 놓고 두 팔과 등허리 사이로 목총을 질러서 괴어놓은 다음, 목총 양 끝에 밧줄을 매어 천장에 달아놓는다.

처음에는 짚단 같은 것을 발밑에 괴어 발이 겨우 짚단에 닿게 천장에 매달아놓는다. 그러면 몸무게로 인하여 등 뒤로 젖혀진 겨드랑이 아래에 괴어있던 목총이 위로 바싹 치켜지기 때문에 양 어깨는 뒤로 뒤틀려서 쪼개질 지경이 되는 것이다. (주석 4)

가람도 이와 같은 악독한 고문을 겪었다.

주석
1> <가람문선>, 26쪽.
2> 이병기, <해방 전후기>, <가람문서>, 204쪽.
3>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재판기록>
4> 최기호, <한글수난의 '조선어학회사건'>, <역사산책>, 1991년 10월호.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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