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 아뇨, 숲이 있는 문화공원이에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산책하며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다
▲ 숲에서 역사를 만날 수 망우역사문화공원. 격동의 근현대를 살다간 독립운동가, 문화예술가, 정치인 등 여러 분야의 역사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지금은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 전갑남
며칠 전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았습니다. 성북동 만해 한용운의 생가 고택 심우장을 방문하고, 이곳에 선생께서 잠들어 계시다 하여 찾아볼 요량입니다.
절기상으론 가을인데, 계절은 아직 여름의 연장! 햇볕이 유난히 무척 따갑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등에 땀이 흥건히 흐릅니다.
초행길이라 어느 코스로 가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내 나이 또래분들이 앞서갑니다.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걷습니다. 먼저 간 일행을 따라가 보면 될 것 같아 바짝 뒤를 밟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혼자인 것 같은데. 그늘이 지기는 해도 이 사잇길은 좀 가팔라요. 싸목싸목 걸으면 걸을 만해요."
말씀이 살갑습니다. 오래전 만난 친구처럼 저를 허물없이 대합니다. 자기들은 공원 아래 사는지라 시간 나는 대로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합니다. 여기 길은 손바닥 보듯 훤하다면서요.
"이 길로 오르면 한용운 선생 묘소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요쪽이 산길이라 그렇지 더 가까워요. 쫌만 가면 큰길로 합쳐지고 이정표가 보여요."
▲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사의 의 묘역. 만해 동상과 오도송 시비가 있었다. ⓒ 전갑남
만해 선사 묘소 이야기가 나오자 일행 중 한 분이 <님의 침묵> 첫 대목을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립니다.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ㅡ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일부 ㅡ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여기 나온 "'님'은 누구야?" 하고 묻습니다.
"그야 사랑하는 님일 테지!"
"스님한테 사랑하는 님이 있었남?"
"허 참, 만해 선사 묘지를 가보면 부인 묘도 나란히 있잖아."
"난 님이 조국이라 생각했는데..."
'시'라는 게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 있고, 또 그것이 시를 읽는 묘미가 아니냐며 '장이야, 멍이야' 두 분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함께 앉아 마신 '약'... 근현대 인문정신이 살아있는 공원
한참을 걷다 그늘진 평평한 곳에서 쉬어가기로 합니다. 함께 앉아 땀도 식힙니다.
"어서 약이나 꺼내. 시원할 때 먹어야 맛있지!"
약이라니 뭔가 했는데, 한 분이 배낭에서 막걸리를 꺼냅니다. 다른 분은 안주로 팩에 담긴 돼지 족발을 꺼내구요.
▲ 살갑게 다가온 사람을 만나 간단한 간식을 나눠 먹었다. ⓒ 전갑남
제게도 막걸리를 따라줍니다. 산에서 만나면 다 친구가 된다면서 쭈욱 들이키라 합니다. 집에서 얼려 왔는지 막걸리가 시원합니다. 족발 한 입도 꿀맛입니다.
"며칠 전, <오메 단풍 들겠네> 시인 김영랑 선생 묘소도 옮겨왔더라고."
"그분 전라도 강진 태생으로 독립운동가 아니었나?"
▲ 최근 이장되어 온 영랑 김윤식의 묘. ⓒ 전갑남
영랑의 유택은 예전 망우리에 안장됐으나, 부인 안귀련 여사가 사망하자 이듬해 용인천주교공원묘지로 이장해 함께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 옮겼다고 합니다. 나더러 한번 찾아보라 권합니다.
자기들은 아차산까지 가야 한다고 합니다. 나와 길을 달리하고 인사를 나눴습니다.
"만해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우리 근현대 문화예술계를 빛낸 인사들의 뜨거웠던 정신을 잘 되새기고 가세요."
지금부턴 큰길을 따라 걷습니다. 아름드리 나무 그늘이 있고 길이 잘 닦여 있어 걷기에 편안합니다. 숲에서 새소리도 들립니다.
▲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작고한 독립운동가와 문화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다. ⓒ 전갑남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차근차근 둘러봅니다. 오기 전엔 망우리 공동묘지로만 알았는데, 와보니 이곳저곳 의미가 큰 곳입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자락에,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우리 근현대사 역사적 인물들의 묘소가 쭈욱 줄지어 모셔져 있습니다.
▲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역. 묘비에 새긴 동심여선(童心如仙), 선생의 어린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 전갑남
▲ 시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의 묘. ⓒ 전갑남
▲ 황소와 아이를 무척 사랑했던 이중섭 화가의 묘. 그는 비운의 천재 화가로 알려졌다. 묘비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이 인상적이다. ⓒ 전갑남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위창 오세창, 이중섭 화가, 박인환 시인 등의 묘소를 비롯하여 내가 사는 강화도 출신 죽산 조봉암 묘도 찾아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격동기 근현대사 역사 인물들을 만납니다. 우리가 잊고 지낸 인문정신을 하나하나 깨우칩니다.
특히, 유관순 열사의 묘역에서는 절로 숙연해집니다. 묘비에 새겨진 유언을 읽으며 독립에 대한 열사의 순고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ㅡ 유관순 열사의 유언 ㅡ
▲ 무연고자 유해 속에 유관순 열사도 함께 묻혀있다. ⓒ 전갑남
▲ 유관순 묘역에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을 읽고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 전갑남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진 고문 끝에 열여덟 아리따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유관순 열사. 이태원공동묘지에서 수많은 무연고자와 섞여 열사도 이곳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작은 봉분 속에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함께 묻혀 있다니 슬픔이 밀려옵니다.
망우역사 문화공원은 수만 개의 묘지가 꽉 들어찬 공동묘지에서 이제는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013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고 망우리 인문학 사잇길 코스가 조성되었습니다.
망우동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죽어서 묻힐 무덤 위치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근심이 사라졌다 해서, 근심을 잊었다는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중랑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르자 가슴이 확 트입니다. 근심이 사라지는 곳 망우. 나도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잠시 근심을 내려놓습니다
▲ 벌초가 깨끗이 되어 있는 망우리 묘소. 예전엔 망우리공동묘지라 불렀다. ⓒ 전갑남
▲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울창한 숲이 있는 공원으로 사시사철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 전갑남
▲ 망우리 사잇길.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 전갑남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공간으로 탈바꿈한 공원에서 살가운 분들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격동의 근현대를 역사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숲과 역사와 문화가 있는 힐링의 공간 망우역사문화공원. 공원 산책길은 호젓하고 걷기에 편안합니다. 두어 시간 생각과 산책을 가벼운 등산으로도 제격이구요. 공동묘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용마산,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산행 코스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습니다.
지하철 경의중앙선 양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게 갈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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