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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고 75년 지나 대통령표창 받은 애국지사

[오늘의 독립운동가 6] 1979년 9월 20일 타계한 김보식 지사

등록|2024.09.21 18:05 수정|2024.09.21 18:05

▲ 김보식 지사, 1919년 3월 19일 만세시위 현장이었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주재소의 터(현재는 텃밭이 되어 있다). ⓒ 국가보훈부


1979년 9월 20일 김보식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41년 흐른 2020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는 지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 지사는 1891년 4월 5일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당시 28세였는데, 같은 경상북도 영덕군의 영해면, 병곡면, 축산면, 영덕면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량동의 이현우, 신리동의 이현설, 창수동의 김보식과 이수각 등은 당장 내일(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주재소를 에워싸고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각자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내일 시위 참가 주민들을 조직했다.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부르며 건물과 집기 부숴

이튿날 오후 4시쯤 200여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거나, 미처 준비를 못했으면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본래 계획한 대로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갔다. 인력 대부분이 인근 면으로 파견 간 상황이라 주재소에는 보초를 서는 수준의 근무자들뿐이었다.

시위대가 몰려오는 것을 본 왜인 순사와 조선인 보조원은 재빨리 몸을 들쳐 달아났다. 군중은 주재소 건물 3동과 집기류, 시설물 등을 마구 부수었다. 환호소리가 말그대로 천지를 뒤흔들었다.

얼마 지니지 않아 왜인 순사들과 친일 조선인 보조원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들이닥쳤다. 총독 하세가와가 "시위에 가담한 자들은 무차별 사살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은 속수무책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김보식 지사는 시위 주동자 중 1인으로 지목되어 3월 31일 영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 사이 악랄한 고문을 무수히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 후 26년 지나 1945년 독립을 맞았고, 그로부터 다시 34년 지나 1979년 타계했고, 또 다시 41년 지나 202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립 이후 75년 만에, 타계 이후 41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어째서 이토록 서훈이 늦었을까? 아직도 우리나라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듯하다.

창수면에는 항일유적이 많다

일석삼조 등의 격언은 여행에도 요긴하게 적용할 교훈이다. 창수 주재소 터(창수3길 20-3)를 답사한 김에 갈암종택, 존재종택, 희암재사, 정담 정려비도 둘러볼 일이다.

인량6길 12-23의 갈암종택과 오촌리 318-1의 존재종택은 구한말 이수악 의병장 유적이다. 수리 454의 희암재사는 임진왜란 경주성 탈환 전투를 이끈 박의장(당시 경주판관) 유적이고, 인량리 255-1의 정담정려비는 임진왜란 웅치 전투를 지휘한 정담(당시 김제군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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