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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의열 투쟁에서 가장 괄목할 업적"

[오늘의 독립운동가 7] 1955년 9월 20일 타계한 의열단 김재수 지사

등록|2024.09.22 18:20 수정|2024.09.22 18:20

▲ 김재수 판결문(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 의열 기념관(밀양) ⓒ 국가보훈부


국가보훈부 1995년 간행물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박성수 저)>에 "1920년대에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낸 단체는 의열단"이라는 표현이 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김재수 지사는 1888년 11월 19일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55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김 지사가 의열단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1920년 8월 6일이었다. 그는 당시 경남은행 구포지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평소 친분을 맺고 정겹게 지내오던 배중세로부터 두 사내를 당분간 숨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배중세는 의열단원이었고, 두 사내 또한 의열단원이었다.

배중세의 부탁을 들어주며 독립운동에 투신

의열단원 이수택(경북 칠곡인)과 윤치형(경남 밀양인)은 일제 관공서 파괴와 악질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했지만,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배중세와의 친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재수는 8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이수택과 윤치형을 각각 자신의 집에 은신시켰다.

하지만 경기도 경찰부 순사 미나미 추오헤이(三竝忠平)가 냄새를 맡고 8월 9일 김재수의 집에 닥쳤다. 김재수는 이수택을 자신의 친척 '김기동'으로 둘러대어 체포되지 않게 만들었지만, 결국 윤치형은 끌려갔다.

의열단원 두 명 피신시킨 일 드러나 투옥과 고문

이때 배중세도 김재수 집 이웃에 숨어 있었다. 김재수는 윤치형이 피체되었다는 사실을 배중세에게 신속히 알려 그가 피신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후 계속된 경찰의 수사와 추적으로 배중세가 9월에 붙잡히고, 결국 김재수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김재수는 1920년 10월 9일 경성지법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1년 2월 28일 예심 종결과 더불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도쿄에 폭탄을 던질 계획인 이종암을 돕다

9개월의 형옥과 고문 끝에 풀려난 김 지사는 은행 퇴직 후 어업에 종사했다. 1925년 9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이 일본 도쿄에 가서 폭탄을 던질 계획 아래 자금 조달 차 대구에 왔다. 김 지사는 이종암을 그 달 14일 이래 대구 봉산정 자신의 집에 은신시켰다. 또한 배중세에게 자금 조달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사이 이종암은 요양차 경북 달성군 달서면 노곡동 이기양의 산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김 지사는 경남 하동의 박종원과 함께 각각 5천원(현 시세 대략 5억원)씩을 10월 15일까지 내기로 약정하였다. 하지만 박종원이 날짜를 맞추지 못하던 중 밀정의 제보로 이종암이 11월 5일 피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김재수 11개월 투옥과 고문, 이종암 순국

이종암, 김재수 등 10명의 의열단 동지들은 12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김재수는 투옥과 고문을 겪다가 약 11개월 만인 1926년 10월 13일 보석 으로 풀려났다. 이종암은 징역 13년을 언도받아 복역 중 사망 직전에 이르러 병보석으로 출소, 열흘 만인 1930년 5월 29일 순국했다.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에 김원봉, 윤세주 등 밀양 출신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김재수 지사의 "가계와 성장과정은 미상(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면 인봉리 77번지(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이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지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매월 한 분을 선정하면 1500년 이상, 세 분을 선정하면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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