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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오는 '조커', 이 영화 먼저 보세요

[안치용의 영화적 사유] <조커>

등록|2024.09.23 11:21 수정|2024.09.26 14:57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조커(Joker)>(2019년)는 압도적인 작품이다.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이지만, 뜯어보면 많은 사유가 담겼다. 분석할 게 너무 많은 게 인문학적 결함이란 농담이 가능하지 싶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정신분석학이나 계급갈등 관점의 분석이 많을 듯하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정신적 불안정과 고통, 이어진 폭력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되고, 아서의 내적 고통과 사회적 압력 사이의 충돌이 비중 있게 다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가 10월 1일 <조커: 폴리 아 되>로 돌아온다.

프로이트

아서가 정신 질환을 앓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신 질환과 유아·유년기 학대 경험이 현재의 분열적 성격과 폭력 성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려진다. 그의 현재 행동에 과거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은 무난하다. 기억 흔적의 환기로 트라우마가 활성화하며 내적 갈등이 심화하고, 억압된 감정이 분출하면서, 원초적 불안이 폭발한다. 그렇게 파괴자가 된다.

아서의 자아 붕괴는 슈퍼에고와 에고, 이드 사이 균형의 붕괴에서 비롯한다. 다만 프로이트의 3자 모델에서 주요 대립이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고 무의미하다. 자아 붕괴라는 말이 틀렸을 수 있다. 외부의 충격이든 내부의 각성이든 균형이 붕괴하고, 이어 새로운 균형에 도달한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균형은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서 조커가 말하듯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아의 재구성이 맞다.

가장 프로이트적인 소품은 총이다. 총은 정신분석학에서 남근을 상징하는 표현인 팔루스에 다름 아니다. 관객은 영화에서 총이 단순한 무기를 넘어서서 권력, 폭력, 남성성을 상징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성적 자신감과 매력과도 관련된다. 아서가 총에 익숙해질수록 정신적 왜소에서 벗어난다. 총을 써서 사람을 죽임으로써 조커로 거듭난다.

총을 팔루스로 활용하는 방식은 문학이나 영화에서 일반적이어서 클리셰에 가깝다. 클리셰의 활용은 진부하지 않았다. 총은 곧 살펴볼 니체와도 연결된다. 총은 팔루스이자 힘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사회적 관점과 다소 상충한다. 사회적 소외와 거대 시스템의 냉대를 아서의 고통과 폭력 분출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면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냐 구조냐 하는 오래된 분석 틀의 갈등이 다시 등장한다. 영화에선 둘 다 작용한다. 실제 현실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개인과 구조 각각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다.

▲ 조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서와 어머니의 관계를 설명하며 동원되는 용어이다. 아서는 어머니와 매우 강한 유대를 형성하며 병든 어머니를 목욕시키는 등 자상하게 돌본다. 생활에서는 어머니가 아서에게 의존하지만 정신적으론 아서가 어머니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말하는 어머니와의 상징적인 유대와 갈등을 연상시키고,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의 애정과 증오가 얽혀서 폭발하는 대목에서 이 콤플렉스가 더 부각된다. 예컨대 어머니를 살해하기 전 내뱉은 다음의 대사가 상징적이다.

"내 지랄 맞은 인생을 통틀어 단 1분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 난 내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더군."
I haven't been happy one minute of my entire fucking life. (...) I used to think that my life was a tragedy... but now I realize, it's a fucking comedy.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신하는 중요한 계기가 어머니 살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머니는 상당 부분 슈퍼에고로 기능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은 아무래도 부친살해이다. 영화에서 실제 아버지인가와 무관하게 아서가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두 명이다. 아서는 유명한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직접 살해하며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고 토머스 웨인(브렛 컬런)의 죽음에는 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웨인의 회사 직원을 살해했으므로 뭉뚱그려 부친살해의 양상으로 보아도 되겠다.

아서가 두 사람에게 원한 것은 인정이다. 자신이 존중할 만한 기성의 권위에 의한 인정. 그러나 인정투쟁이 실패하며 아서는 권위를 폭력적으로 전복하고 스스로 권위를 창조한다. 아서에서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에 권위가 개입한다. 권위로부터 인정을 갈구하던 아서는 권위를 살해한 후 조커로서 권위를 획득한다. 확실히 아서는 부모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조커로 부활할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다른 점은 아서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로 행했다는 것. 그리스 신화 및 비극의 신탁과 운명이 현대 사회에서는 근대성의 억압으로 변용돼 표현된다고 할 때 아서는 근대성의 불가피성을 기꺼이 넘어선다.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은 자신의 통제 밖에 존재하는 운명에 의해 파멸한다. 그리스 신화나 비극의 주인공이 맞이하는 필연적인 파멸은 그리스 비극의 영웅 서사에서 기본값이다. 아서 또한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분열 속에서 운명의 혼란에 휩쓸려 극단적인 결말에 이르기에 그리스 영웅 서사와 유사성을 보인다는 해석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아서는 오이디푸스 왕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살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옷에서 브로치를 꺼내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실명한다. 반면 아서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로 상상한 인물 또한 살해한다. 어머니를 살해하기 전에 한 "난 내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더군"이란 언명은 아서가 코미디언으로, 조커로 각성함을 시사하는 대사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비극은 니체의 사유로 옮아간다. 이 대목에선 특히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를 떠올리게 된다. 조커는 아서에게 운명이다.

▲ 조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니체

아서가 점점 더 혼돈과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를 연상시킨다. 디오니소스는 광기와 황홀경,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상징하는 신이다. 아서가 자신의 광기를 '문제'가 아니라 특성으로 수용하면서 조커로 변모하는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죽이기 직전에 일어난 장면이다.

사회 규범을 무너뜨리고, 폭력과 혼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은 확실히 디오니소스적이다. 아폴론적 질서를 디오니소스적 파괴로 대체하는 영화의 전개에서 니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열광(der Dionysische Rausch)'이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은 니체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와 만난다. 니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동력으로 설명한 '힘에의 의지'에서 Macht는 권력으로도 번역하지만 이 영화를 설명할 때는 힘이 훨씬 더 정확하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이 고통, 혼돈, 그리고 비극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지평에서 조우한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은 이러한 삶의 혼돈과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힘에의 의지'는 이러한 수용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는 동력이다. 니체의 두 개념은 자유와 창조성의 추구로 연결되는데, 마치 이 영화를 두고 한 얘기처럼 들린다.

'힘에의 의지'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에 사로잡히고 '힘에의 의지'로 무장한 아서는 '운명애'를 절감하며 마침내 초인(Übermensch)이 된다. 조커가 초인이다. 초인은 기존 사회적 규범과 도덕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꼭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전반에 니힐리즘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반부 머레이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 도덕적 상대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이 니힐리즘은 전면적 거부가 아니라 창조적 거부이다. 기존 도덕과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도덕과 질서의 필요성을 조커의 파괴적 행동으로 상징화한다. 운명애의 권위를 내세우는 초인은 절대 허무로 잦아들 수는 없다.

조커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할리우드식 빌런이 아니다. 계급갈등의 틀에서도 벗어나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사회비평 요소가 섞인 채 니체의 철학이 조커의 캐릭터와 내러티브에 관통한다. 영화 <조커>를 해석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유를 하나 들라면 단연 니체일 것이다.

금지

아서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로 그려지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하지만, 종국에 각성을 통해 전복의 아이콘이 된다는 점에서 계급 갈등이나 자본주의의 빈부격차 문제를 거론하기 용이한 영화가 <조커>이다. 그렇게 보지 못할 것이 없지만 그렇게만 보면 코끼리 다리 하나만 만진 격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군중의 분노는 '디오니소스적 열광'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19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68혁명)을 연상시킨다. 두 사건 모두 체제에 대한 저항과 억압에 대한 폭발적 반응을 표현한 점에서 닮았다. 계급의식으로 무장했다기보다 기존 질서를 철저히 거부하는 대중의 비조직적이고 폭발적 저항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계급의식이 저변에 폭넓게 깔리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뾰족하게 찌르진 않는다.

▲ 조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금지를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는 68혁명의 구호는 조커의 캐릭터 푯말로도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는 광대알선업체의 계단에 붙어 있는 "웃는 걸 잊지 마세요(Don't forget to smile!)"라는 팻말에서 아서가 'forget to'를 지우는 장면과 연결된다. 그래서 팻말이 "웃지 마세요(Don't forget to smile!)"로 바뀐다. 그냥 '웃지 마세요'(Don't smile!)"와 'forget to'가 지워진 채로 보이는 "웃지 마세요(Don't forget to smile!)"는 천양지차이다. 'forget to'가 지워진 것을 잊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의 대사는 현실에서 통용될 수 없는 조커만의 진술이다. 위로 삼아 덧붙이면 실존적으로는 누구나 조커가 될 수 있기는 하다. 무엇인가를 '잊는 것(forget to)'을 금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평생,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 존재인지조차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존재를 알아요. 사람들이 날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For my whole life, I didn't know if I even really existed. But I do, and people are starting to notice.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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