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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편수관 거쳐 서울문과대 교수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13]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국어 교과서의 편찬이었다

등록|2024.09.26 15:01 수정|2024.09.26 15:01

가람 이병기 선생의 '매창뜸' 시비가람 이병기 선생의 '매창뜸' 시비 ⓒ 오승준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가람은 전라북도 각지의 초청을 받고 한 달 동안 한글 강의를 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우리말 강의는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특히 성장기에 일본어를 국어라고 배워온 청소년들에게 한글 교육은 시급한 과제였다.

서울에서 빨리 상경하라는 동료들의 연락이 빗발쳤다. 해방정국에서 그가 할 일이 많았다. 일제의 긴 압정으로 일할 수 있는 인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9월 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정책을 발표하고 9월 7일에는 미국 극동사령부가 남한에서 미군정 실시를 선포하는 등 국내정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이 조직한 인민공화국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조선인 행정 관리와 경찰을 인계받아 통치했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분야는 미군정이 공용어로 영어를 택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그토록 말살하고자 했던 우리말(과 글)이 해방과 함께 부활하고, 그는 전북지역에 국한되었지만 한 달 여 동안 한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0월 초순에 상경하여 예전에 살았던 계동에 거처를 정하고 10월 30일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군정청의 편수국장이 된 최현배의 지원이었다. 그리고 집요한 노력과 설득으로 '영어공용화'를 막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국어 교과서의 편찬이었다.

해방된 국민 2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그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의 편수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산하에 국어교과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수록할 작품의 선정 등 어려운 역할을 차질없이 수행하였다. 편수과 직원들에게 '한글문법'을 강의하고,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에게 '국어의 존중과 미화'의 특강, 배제중학에서 '개천절에 대하여', 한글문화보급회에서 한글 강습, 조선영화협회에서 '역사에 대하여' 특강 등 영일이 없이 활동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에도 그의 한글과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활동은 이어졌다. 계성여학교 3.1운동 특강, 학술용어 제정위원회에서 발제, 중등국어교본편찬위원회에서 제안설명, '고적·국보·명승·천연물보존회'에서 제1부 분과위원장 피선, 임시중등교원양성소에서 '국문학사' 특강·아악부 시조강습의 '시조개론' 담당, 성인교육용 국어교재 편찬, <어린이 역사> 편찬, 행정원 양성소에서 '조선문화' 특강 등을 하였다.

긴 세월 동안 자행된 일제의 조선문화 말살정책으로 인재다운 인재가 없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인재를 키우는 일이 시급했다. 1946년 6월 18일 미군정청이 국립 서울종합대학교안(국대안)을 발표하고, 학생들이 이를 반대하는 등 혼란을 거쳐 국립서울대학이 설립되었다.

서울대학 문리과 대학의 학장 이태규와 이희승·김두헌·이병도 등 교수들이 가람을 전임교수로 초빙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군정청 최현배 편수국장에게 요청했다.

가람은 1946년 10월 3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2시간에 걸친 첫 강의를 하게 된다. 과목은 〈국문학개론〉이었다. 가람이 서울대학교에 출강을 한다니까 이곳 저곳의 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밀어닥쳤다. 그래서 가람은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러다가 〈초등국어독본〉 〈초등국어 임시독본〉 〈중등국어교본〉 등의 편찬을 어느 정도 마무리짓게 되자, 1947년 7월 5일, 편수국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대학교수와 연구에만 평생 종사할 것을 다짐했다. (주석 1)

이 시기에 쓴 것인지는 불명하지만,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시마(詩魔)>이다.

시마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히 그의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

펴 든 책 도로 덮고 들은 붓 던져두고
말 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은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 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주석 2)

주석
1> 최승범, 앞의 책, 57쪽.
2> <이병기 대표작 20선>, <겨레시조> 창간호, 1992년 봄, 1992.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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