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하고 해외 간 이 사람,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기차 역장에서 이탈리아 요리 셰프로 변신한 박석민 전 목포역장
▲ 목포 '피렌체역' 전경. 박석민 전 목포역장이 연 이탈리아 음식점이다. ⓒ 이돈삼
첫인상이 좋다. 하얀 벽에 파란색 출입문이 깔끔하다. 출입문 양쪽으로 야생화가 이쁘게 피어있다. 허름한 원도심 골목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멋지다. 이국적이다. 색다른 문화와 감성이 묻어난다.
가게 안 벽면은 이탈리아 명소로 채워져 있다. 베네치아, 피렌체 두오모, 나폴리, 콜로세움, 피사의사탑이 보인다. 그림이다. 사진보다 더 낫다. 그림 설명과 함께 작가의 이름과 약력이 붙어 있다. 모두 지역작가들이다.
목포역장 그만두고 이탈리아 간 사연
▲ 목포 '피렌체역'의 내부. 벽면이 온통 이탈리아 풍경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 이돈삼
목포 '피렌체역' 이야기다. 피렌체역은 박석민 전 목포역장이 낸 이탈리아 음식점 이름이다. 박 전 역장은 셰프(chef, 주방장)다. 파스타, 샐러드, 스테이크가 주된 식단이다. 파스타는 토마토, 양송이, 고구마, 전복, 해산물 등을 가미한다.
1983년 강원도 영월 연당역에서 철도와 인연을 맺은 박 셰프는 2022년 명퇴했다. 정년을 2년 남긴 상태였다. 그는 기차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목포역장을 세 번이나 지냈다. 광주역장, 나주역장을 거쳐 마지막 근무지도 목포역이었다.
▲ 목포역장에서 이탈리아 요리사로 변신한 박석민 셰프. 자신의 가게 '피렌체역'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 이돈삼
박 셰프가 요리에 관심을 가진 건 퇴직하기 5년 전부터. 퇴직 후 삶을 고민하면서다. 틈틈이 짬을 내 한식과 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ai시대라고 합니다. 커피를 로봇이 내어주고, 라면도 로봇이 끓여 줍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남을 직업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요리더라고요. 요리사의 손맛은 로봇으로 대체할 수 없잖아요."
▲ 목포역장 재직 당시 박석민 역장. 그는 목포역 2층에 기차여행객 쉼터를 겸한 미술관을 꾸며 큰 호응을 얻었다. ⓒ 이돈삼
이탈리아 요리에 관심을 가진 박 셰프는 유학을 결심했다. 주변에서 만류했다. 나이가 많고, 현지 언어(이탈리아어)도 못 한다는 이유였다. 이탈리아 요리는 서울에서도 배울 수 있다며, 서울로 가라고도 했다.
박 셰프는 퇴직하자마자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현지에 가서 요리 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이탈리아 피렌체 풍경 그림. 목포 '피렌체역' 벽면에 그려져 있다. ⓒ 이돈삼
▲ 요리를 하는 박석민 셰프. 기차와 함께 한 인생 40년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 요리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 이돈삼
"처음엔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밥만 먹여주고 재워주라 했죠. 일하면서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거절당했습니다. 로마 인근 요리학교(셰프 아카데미)도 찾았습니다. 나이가 많고, 회화도 안된다는 이유로 마다하더군요.
언어는 어학원 다니면서 빨리 배울 테니, 입학만 시켜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딴 양식조리 기능사 자격증도 보여줬죠."
겨우 입학 허가를 받은 박 셰프는 누구보다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익혔다. 여행 비자도 유학 비자로 바꿨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수업은 힘들었다. 젊은 학생들과 보조를 맞추기 버거웠다. 현지 생활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잠깐 후회도 했지만, 이겨냈다. 파스타, 피자, 젤라또, 디저트 등 다양한 요리 수업을 다 받았다.
시내 레스토랑에서 실습도 마쳤다. 1년 만에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정부에서 발행한 셰프 자격증을 받았다.
어렵게 얻은 요리사 자격증... 인생 2막의 시작
▲ 고든랜지 비프웰링턴. 소고기 안심에 표고버섯을 더한 스테이크다. ⓒ 이돈삼
지난 3월 귀국했다. 고민은 계속됐다. '과연 내가 레스토랑을 할 수 있을까?' '손님이 안 오면 어떡하지?' '가게 10곳 문 열면, 2년 안에 8곳이 문 닫는다는데….'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변에서도 응원보다 걱정을 얹어줬다.
"우리 속담에 '시집은 가도 후회, 안 가도 후회'라는 말이 있어요.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라면, 가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시작도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포기는 김장 용어일 뿐, 내 인생에 포기는 없다고 마음 다잡았죠."
박 셰프의 회고다.
그는 처음 음식점을 낼 곳으로 무안 몽탄역을 염두에 뒀다. 몽탄역은 시골 간이역으로 정감 있었다.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게 흠이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목포 바닷가도 생각했다. 하지만 목포역전 원도심이 자꾸 어른거렸다. 역장을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들었고, 원주민과 함께 활력 잃은 원도심을 다시 세우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 박석민 셰프가 만든 샐러드. '토마토 모짜렐라 카프레제'로 이름 붙여져 있다. ⓒ 이돈삼
▲ 고구마 가지 라자냐. 목포에 많은 비파로 청을 만들어 소스로 가미했다. ⓒ 이돈삼
원도심의 작은 공간을 빌렸다. 인테리어는 전문가와 상의했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여러 음식점의 안팎을 많이 봐둔 터였다. 건물 앞은 '꽃의 도시 피렌체'를 테마로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실내에 그림을 그린 것도 피렌체의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였다.
요리엔 자신 있었다. 이탈리아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다. 박 셰프는 거기에다 담백함과 건강을 더했다. 목포 특산 해산물도 가미해 색다른 맛을 냈다. 목포에 많은 비파나무 열매로 청을 만들어 넣기도 한다.
한번 다녀간 손님이 홍보를 자청했다. 걱정하던 지인들도 와서 요리 맛있고, 분위기도 좋다며 칭찬하고 격려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가게 겉모습을 보고 들어온 여행객들도 실내 분위기 좋고 요리도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작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설명해 주는 박석민 셰프. 그는 목포역장 재직 때도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 이돈삼
"목포는 호남선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입니다. 기차여행 1번지죠. 맛의 도시이기도 하고요. 좋은 요리, 건강한 요리를 하는 목포 맛집을 꿈꿉니다. 목포를 알리는 데도 한몫할 겁니다."
박 셰프의 자신감이다.
박 셰프는 주변 상인과 함께 거리를 깨끗이 하고 이탈리아 거리처럼 아름답게 꾸밀 꿈을 꾼다. 골목 벽화도 그려 목포를 대표하는 맛집, 맛의 거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역장에서 셰프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의 앞날을 응원한다.
▲ 이탈리아 음식점 목포 피렌체역. 목포역 부근 원도심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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