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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땐, 카레덮밥

카레 물 조절 실패의 비극적 결말... 지금은 잘 합니다

등록|2024.09.29 15:26 수정|2024.09.29 15:26

▲ 가을초입의 거리풍경 ⓒ 어혜란


유난히도 유난스러웠던 올여름.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덥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쏟아냈던 날들이 아니었나 싶다. 햇빛이 뜨거워 정말 덥기도 더웠지만 마치 동남아에 온 듯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루빨리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 바람이 찾아들길 기다렸지만 유난히 올해의 가을은 심통난 아이처럼 늦장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손님처럼 창문을 타고 느닷없이 불어온 선선한 가을바람. '드디어 왔구나. 입대한 남자친구의 첫 편지를 받은 것처럼 어찌나 반갑던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일교차가 제법 벌어져서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한 바람이 분다. 어느새 맹렬하던 태양의 열기도 힘이 빠진 듯 누그러들었다. 길가에 핀 나무들도 형형색색 점점 색을 바꾼다.

유난히 무덥고 습한 날씨 탓에 기운 빠지고 식욕이 실종되는 여름을 보냈지만, 어느새 헛헛한 마음을 따스히 덥혀주는 덮밥이 맛있어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그렇다. 가을은 덮밥을 먹기에 딱 맞는 계절이다.

오랜만에 카레덮밥에 도전하기로 했다. 사실, 카레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요리다. 물론 그 누.구.나 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사실 '카레 하수'다. 카레 만들기를 어려워한다는 얘기다. 웬만한 파스타도 뚝딱 만들고, 감칠맛 나는 한식도 곧잘 만들지만 유독 카레가 나의 요리 인생에 발목을 잡았다.

첫 카레를 만들게 된 건 5년 전이다. 신혼 초였고, 초보 주부였지만 누구나 쉽게 만든다는 카레는 시도하기 좋아 보였다. 호기롭게 도전했다. 재료를 먹기 좋게 다듬고, 분말카레가 다른 재료들과 잘 섞이도록 물에 잘 풀어 주었다.

양파, 고기, 감자, 호박 순으로 재료들을 적당히 볶고 레시피에 적힌 대로 물을 붓고 뭉근히 끓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카레 분말을 넣어주면 끝. 따로 간을 맞출 필요도 필요도 없다. 이 얼마나 쉬운 요리인가.

당연히 평소에 접했던 대로 걸쭉한 카레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그야말로 카레탕(?)이 된 것이다! 물 조절에 실패한 카레의 모습은 참담했다. 마치 홍수라도 난 듯 냄비를 가득 채운 샛노란 카레탕에는 갈 곳을 잃은 짐들이 떠다니듯 감자, 고기, 호박 등 각종 재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 누가 카레를 쉽다고 했던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남편은 그날 짜디짠 카레탕(?)을 밥 따로 국물 삼아 떠먹으며 초보운전도 처음엔 다 서투른 법이라며 씁쓸한 위로를 건넸다. 나는 정말로 이 쉬운 요리를 내가 실패할 리 없다며 다음 번엔 꼭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또다시 시도한 카레. 역시 실패였다. 또다시 홍수가 터진 냄비를 보고 있자니 주눅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카레 요리는 재능이 없는가 보다. '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인도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섬세한 묘사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줌파리히리는 고국 음식 카레를 유난히 책 속에서 맛깔스럽게 그려내고 있었다. 알싸한 강황향이 책을 뚫고 집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마지막 카레를 만들었던 것이 벌써 3년 전이었던가. 이쯤이면 요리 실력도 어느 정도 레벨 업 되었고, 다시 시도해 보아도 될 듯싶었다. 마침 가을의 초입에 다가선 날씨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카레덮밥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을까?' 망설여지긴 했지만. '못할 것도 없지 뭐' 도전하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구입하고 카레 만들기에 돌입했다. 더 이상 물 조절에 실패한 카레는 내 인생에 없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매의 눈으로 물과 분말의 정확한 비율을 맞추는데 심여를 기울였다.

먼저 고기, 양파, 감자 등 각종 재료를 깍둑 썰기 한 후, 순서대로 볶아 주었다. 다음은 계량컵으로 맞춘 물을 냄비에 넣고 재료들을 뭉근히 끓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고형 카레를 넣어주고 저어가며 녹여주면 끝. 그동안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저어주고 또 저어주었다. 그러자 점점 점성을 띄며 걸쭉하게 변해가는 카레.

▲ 그날 만든 카레 ⓒ 어혜란


'와! 드디어 성공이다!' 농도와 맛. 두 가지를 완벽히 사로잡은 완벽한 카레의 모습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나도 모르게 쾌재가 흘러나왔다. 결혼 5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나는 카레탕이 아닌 걸쭉한 카레를 맛볼 수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소한 카레덮밥을 한 그릇씩 싹 비워냈다. 성공의 맛이었을까. 그날의 카레는 유난히 꿀맛이었다. 남편은 다음에 또 만들어 달라며 엄지 척을 들어 주었다.

역시 처음부터 잘 되는 건 없다. 실패한 카레를 마주하지 않고서 꿀맛 카레를 맛볼 수 없듯, 실패를 통하지 않고서 성공으로 이르는 길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오늘도 고쳐 쓰기로 했다>의 김선영 저자 말처럼 글을 잘 쓰는 확실한 방법은 '고쳐쓰기'뿐이고, 요리를 잘하는 확실한 방법은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하며 요리법을 고쳐나가는 것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하는 목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친 암벽을 오르듯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믿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사람만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꿈을 이루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면 언젠가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실패에 좌절하기보다는, 작은 한 걸음이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자. 꿈을 향한 여정은 언젠가 값진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도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도 이제 카레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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