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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무릅쓰고 '대일 전단' 붙인 어린 소년들

[독립운동가외전] 단군 올라가신 날 항일투쟁한 신유식·박영수 등

등록|2024.10.03 17:42 수정|2024.10.03 18:25

▲ 1948년 11월 3일 <경향신문> 기사 "오늘 개천절"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현대 한국인들은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생각하지만, 1948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음력 10월 3일에 발행된 그해 11월 3일 자 <경향신문>에 '오늘 개천절'이란 기사가 나왔다. 이때만 해도 음력 10월 3일이 개천절이었던 것이다.

2015년에 <천문학논총> 제30권 제1호에 실린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의 논문 '개천절 일자(日字)와 단군조선 개국년도 문제 고찰과 제언'은 "민간과 종교집단에서는 적어도 구한말 때 이미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고" 의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그랬던 것이 1949년에 달라졌다. 그해 10월 3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오늘은 개천절'이다. 1년 전에는 11월 3일에 '오늘 개천절'이라고 보도했다가, 이때는 10월 3일에 '오늘은 개천절'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인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국경일법)'이 제정됐다.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개천절 날짜를 정하자'는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묵살되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인정하는 어처구니없는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결과다. 위 박창범 논문에 따르면, 양력 10월 3일을 주장한 쪽은 '반만년 전의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바꿀 만큼 지금 상황이 한가롭지 않다', '양력 10월이 날씨도 좋고 풍요롭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단군조선의 건국 시점이 다수결에 의해 '대충' 규정된 일은 단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애착이 그만큼 약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애착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개천절과 짝을 이뤘던 행사가 현대 한국에서는 낯선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에서 파견된 환웅의 아들로 태어나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신선의 세계로 올라갔다. 이를 근거로 대종교 교조인 독립운동가 나철이 구한말에 제정한 것이 '단군 등선(登仙)일'이다. 나철은 단군이 개국한 날과 더불어, 단군이 이 나라를 떠나 승천한 날도 기념했다. 이미지상으로 대비되는 개천절 행사와 단군 등선일 행사를 함께 운용했던 것이다.

단군 등선일이나 단군 승천일보다 어천절(御天節)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이 행사에 관해 1910년 4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단군교에셔난 음(陰) 본월 15일이 즉 단군등선일이라 하야 기념식을 거행할 차(次)로 준비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대종교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나왔다. 멸망 4개월 전에 나온 이 보도에서는 단군교(대종교)가 준비하는 행사로 보도됐다.

4월 16일 자 신문에 적힌 "음 본월 15일"이란 표현 때문에 "음력 4월 15일"을 잘못 떠올릴 수도 있다. 1895년까지 음력이 쓰였으므로 이 시기 사람들은 아직은 음력에 익숙했다. 이 신문이 발행된 4월 16일이 음력 3월 7일이므로, 이 당시 독자들은 '음'이란 표현을 보고 양력 달력이 아닌 음력 달력을 떠올리게 되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예고된 어천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에 이 행사는 '대한민국의 공식 행사'가 됐다. 국내외의 대종교 신도들뿐 아니라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서도 어천절 의식이 거행됐다.

일례로, 1921년 4월 22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어천절 의식이 거행됐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그해 4월 30일 자 <독립신문>은 "지난 4월 22일(음력 3월 15일)은 우리 단군 대황조(大皇祖)께옵셔 어천하옵신 날임으로 그 하라바님의 자손 되는 상해에 재류하는 우리들은 동일 하오 3시에 기념식을 아(我) 의정원 의장(議場) 내에서 개(開)하다"라고 보도했다.

'우리 한민족은 단군 할아버님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상하이의 우리들은 단군 할아버님의 자손'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단군조선에 뒀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문구다. 단군을 임시정부의 할아버님으로 떠받들면서 어천절을 기념했으니, 이 행사의 권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사유 중 하나는 무단 결근이다. 6년간의 재임기간 중에서 상하이에 체류한 기간은 6개월밖에 안 된다. 1920년 12월 13일 첫 출근했고 반년 뒤 상하이를 떠났다. 그 사이에 1921년 어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도 위 행사에 참석했다. 그 6개월 동안에도 툭하면 상하이 밖으로 관광을 떠났던 이승만이다. 그런 그도 '할아버님 승천일' 행사만큼은 피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창신학교 학생들이 보여준 용감한 항일투쟁

▲ 1921년 4월 25일 <동아일보> 기사 "단군기념절에 학생칠명체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어천절 행사에 참석한 1921년 그날, 이 의식을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한 학생들이 있었다. 마산의 사립창신학교 학생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해 4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마산부에서는 지난 이십 이일 '음력 삼월 십오일'은 단군 어텬긔념절이라 하야 '조선 사람은 늘 단군의 어텬절을 긔념하라'는 경고문 가튼 문자를 조선 조희에 써서 전신주와 중요 각처에 붓친 일이 잇섯는대."

어천절을 기념하자는 문구를 수백 장의 조선 종이에 써서 게시했다가 체포된 창신학교 학생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위 기사에는 "신유식 외 륙명"이 언급됐고, 하루 뒤에 나온 4월 26일 자 <동아일보>에는 이들보다 늦게 체포된 박영수·김명조·김광지·김석조·명상귀·최우식이 거명됐다. 신유식은 19세였지만, 박영수는 12세이고 나머지는 14세나 15세였다. 유관순보다 어린 소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일 전단'을 붙였던 것이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이 발행하는 <선도문화> 제29권에 실린 이 대학 조남호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어천절 기념식과 독립운동'에 따르면, "개천절이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고 문명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기념하였다면, 어천절은 단군이 죽어 소멸하지 않고 하늘로 돌아간 것을 기념한 것"이라며 "어천절은 삼신의 영원성을 종교적 신앙으로 믿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창신학교 학생들의 궐기는 단군의 영생불사와 한민족의 영생불사를 외치는 것이었다.

2018년에 <단군학 연구> 제39집에 실린 이숙화 한국외대 강사의 논문 '근대 단군민족주의의 계승과 단군운동'은 "191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불교·기독교·신도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로 규정하였다"라며 "이에 따라 대종교도 금지되면서 개천절·어천절 행사 및 모든 강연들까지 모두 금지당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 속에서 개천절·어천절 행사가 다시 거행되었다"라며 "그러나 건국기념절이 아닌 단군 탄강일로 제한되었다"고 말한다.

위 설명에 나타나듯이 1921년 시점에는 일제가 어천절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지만 행사의 파급력을 축소시키려 애썼다. 이런 시기에 어린 학생들이 어천절을 기념하자며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단순히 어천절 행사에 참석하라는 게 아니라, "조선 사람은 늘 단군의 어텬절을 긔념하라"는 명령조 문구까지 써가며 한국인들의 가슴을 건드렸다. 일제 당국을 자극할 만했던 것이다.

4월 22일은 장날이었다. 한국인들이 장날에 태극기를 꺼내드는 모습은 일제가 그로부터 2년 전에 끔찍할 정도로 경험한 광경이다. 위의 4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당일은 장날인 고로 무슨 일이 잇슬가 하야 경계가 엄중하얏다러라"라고 보도했다. 학생들이 일제 당국을 바짝 긴장시켰던 것이다.

그들의 어천절 항일투쟁은 교사 김려학이 고초를 겪는 원인이 됐다. 그해 5월 10일 자 <동아일보>는 "사립창신학교 교사 김려학 씨는 거월(去月) 삼십일에 단군 긔념하는 일을 교사한 혐의로 마산경찰서에 톄포되여 무수한 고초를 격다가 증거불명으로 무사히 방면"됐다고 보도됐다.

경찰의 수사 진행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위 4월 26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학생들이 전단지를 붙인 것은 "시위운동을 하거나 인민을 선동케 할 목뎍으로 한 것이 아니오"라며 "학생들은 우리가 조선민족이니 조선민족의 시조되는 단군을 섬기는 것이 올흔 일"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보도됐다. 그날 신유식 등이 석방되고 그 뒤 교사 김려학도 무죄 방면됐다. 사건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흐름이 전개됐던 것이다.

창신학교 학생들은 오늘날의 국가보훈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용감한 항일투쟁이었다.

12세부터 19세까지의 학생들이 3·1운동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조선 사람은 늘 단군의 어천절을 기념하라'는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들의 어천절 메시지는 일제지배하의 한민족이 영생불사하리라는 항일 메시지였다. 그래서 일제 당국이 화들짝 놀라며 교사 김려학을 잡아다놓고 고초를 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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