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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안 계속 벌인 경북 의성 대사동 만세운동

[오늘의 독립운동가 19] 9월 30일 타계한 김옥돈, 김윤덕 지사

등록|2024.09.30 14:12 수정|2024.09.30 14:12

▲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532 "항일 독립운동 기념비", 김옥돈 지사 ⓒ 정만진, 국가보훈부


김옥돈(金玉頓) 지사는 1975년 9월 30일 타계했다. 1889년 2월 2일 경북 의성 안평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86세였다. 하지만 1919년 만세운동으로 1년 6개월의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니 평온한 천수를 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울과 평양에서 김원휘가, 대구에서 박상동이 만세운동 참여 후 각각 일본 군경의 체포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쌍계교회 조사(목사를 돕는 직책) 김원휘가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에게 만세 시위 소식을 전달한 것은 당연했다. 서문시장 시위에 참가했던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도 박 목사에게 대구만세운동의 경과를 이야기했다. 박상동은 박 목사의 아들이었다.

박영화 목사는 안사면 대사동교회에 만세시위 소식을 다시 전달했다. 이 교회 장로였던 김옥돈 지사는 3월 15일 예배 후 이종출·이양준·이북술 등과 의견을 나누다가 '오늘 거사하자!'는 데에 합의했다. 그후 이만준·배세태·이맹준·이수원·정갑이·이흔이 등 동민들도 거사 계획에 찬동했다.

쌍계동에서 대사동으로 교회 통해 번진 만세운동

오후 7시무렵 100여 명의 시위군중은 대사동 뒷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얕은 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위 소식을 빨리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다음날(3월 16일)에는 오후 8시무렵 이종출·이만준 등 1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도동, 창길동까지 행진을 벌였다. 다시 3월 17일에는 이웃 부락민 150여 명까지 규합되어 회길동, 화령동까지 "대한독립만세!" 행진을 하고, 안평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도 시위하였다.

18일 시위에는 약 300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3월 19일 낮에도 김옥돈은 이북술과 함께 이수원·이흔이 등 400여 명 시위군중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웃 면인 봉양면의 사부동까지 행진하고, 안평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재차 시위했다.

3월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계속 만세시위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1996년 4월 18일 건립된 <항일 독립운동 기념비> '시설 내용'에 따르면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일어난 안평면 대사리(우리골) 만세시위는 대사리 기독교 교회 교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지도되었으며 농민들이 전면에 나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고 한다.

김옥돈 지사는 연속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그해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윤덕 지사가 주도한 1919년 3월 10일 남문외시장 만세시위 현장인 대구 중구 남산동 관덕정 일대의 모습, 김윤덕 지사 판결문(1919.4.18. 대구지방법원) ⓒ 정만진, 국가보훈부


김윤덕(金潤德) 지사는 1952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888년 11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였다. 1919년 3월 10일 대구 남문외시장(새장 또는 덕산동 시장)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대구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날은 3월 8일이었다. 이날은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구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교사들, 그리고 남산교회 성직자들 중심의 교남YMVA 지도부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이어 2차 시위 도모

이튿날(3월 9일) 오후 3시 무렵,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들을 비롯한 150여 명의 시위대가 2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달성공원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날(3월 8일) 서문시장 시위 후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던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로 해산을 당했다.

한약상을 운영하던 김윤덕 등 지방유지들 중심으로 다시 만세 시위가 기획되었다. 날짜는 그 다음날인 3월 10일, 장소는 남문외시장(현재의 중구 남산동 관덕정 일원)으로 정했다. 3월 8일이 서문시장 장날이었듯 3월 10일도 장날이었다.

3월 10일 시위도 장날에 맞춰 벌이기로 계획

김윤덕을 비롯한 유지들과 학생들은 9일 하루 내내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만세시위를 벌일 날이 바로 내일이었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이윽고 3월 10일 4시30분쯤, 시장에 인파가 가장 많이 모인 때를 기다려 학생들이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틀 전 서문시장에서 달성군청(현재의 동성로 대구백화점 자리)까지 이어진 시위 행진에 혼이 났던 일본 군경의 감시와 통제는 철저했다. 장터에 모인 수백 명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시가지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사방을 에워싼 일본군경의 총칼에 가로막힌 탓이었다.

김윤덕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은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에게 징역 6월을 언도했고, 5월 18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도 같았다. 김 지사는 6개월 동안 고문과 감옥살이의 고통을 겪었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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