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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하면 자궁 손상 우려" ... 여자 월드컵의 숨겨진 진실

[리뷰] 1971년 여자 월드컵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 코파71 >

등록|2024.10.03 19:28 수정|2024.10.03 19:28

▲ 영화 < 코파71 > 중 한 장면 ⓒ NEW BLACK FILMS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네요."

다큐멘터리 영화 < 코파71 >의 오프닝 장면에 출연한 브랜디 채스테인의 말이다. 브랜디 채스테인은 과거 1991년 첫 '공식' 여자 월드컵 당시 미국 국가대표팀 소속이었다. 그가 화가 난다고 한 이유는 < 코파71 > 제작진이 보여준 영상 때문이었다.

영상에는 1971년 11만 명의 관중이 모인 멕시코 아스테카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열린 축구 경기가 담겨있다. 관중을 본 브랜디 채스테인은 "남자 축구 경기인가요"라고 물었지만, 열띤 관중들의 환호 속에 입장한 건 22명의 여성 축구 선수들이었다. 브랜디 채스테인이 속한 미국대표팀이 우승했던 1991년 대회가 역사상 첫 여자 월드컵으로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그 이전에도 여자 월드컵이 열렸다는 걸 알려주는 영상이었다.

앞서 채스테인이 화가 났다고 말한 이유는 여자 월드컵 우승팀 선수였던 자신조차 모르는 '묻혀버린 여자 축구의 역사'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0년대 미국 여성 축구 국가대표팀의 스타였던 알렉스 모건도 다큐에 출연해 "이런 역사를 내가 어찌 모를 수 있었는지..."라며 당혹스러워한다.

2024년 9월, 17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 < 코파71 >은 50년 가까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비공식' 여자 월드컵의 역사를 발굴해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 영화 < 코파71 > 포스터 ⓒ NEW BLACK FILMS


여성 축구, 50년 동안 금지된 '황당한' 이유

다큐 < 코파71 >은 1971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여자 월드컵을 다뤘다. 1970년 남자 월드컵은 브라질 축구 스타 펠레가 활약하며 흥행에 성공했는데, 어째서 1971년 여자 월드컵은 잊힌 역사가 됐을까. < 코파71 >에 따르면, 당시 피파를 비롯한 국제축구연맹이나 협회는 1971년 여자 월드컵을 공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매체와 각국 축구 협회들이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고 외면하기까지 했다.

< 코파71 > 제작팀은 여자 축구계가 겪어야 했던 차별의 역사를 되짚기 위해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0년대 초반에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여성 선수들의 참가 열기에 불이 붙기 시작했고, 영국의 프로 구단들은 여성팀 창단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영국 축구협회는 오히려 여성 축구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각 구단에 '여성이 구단 시설을 사용하도록 허용하거나, 여성팀을 창단한다면 구단 자체에 징계를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성이 그라운드를 밟는 일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조치는 영국을 넘어 1920년대 전 유럽과 미국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그 이유도 황당했다. '여성이 축구한다니 부적절하고 음란하다'는 남성 축구 팬의 반발, '여성의 신체는 축구를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축구계 인사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 코파71 >에 등장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당시 영국 의대 교수들이 "여성이 축구할 경우 자궁 손상이 우려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여성들이 경기장에서 축구하는 일은 1970년 관련 조치가 철회되기까지 세계적으로 약 50년 가까이 금지됐다.

50년 묻혔던 '첫 여자 월드컵'의 역사

▲ 영화 < 코파71 > 중 한 장면 ⓒ NEW BLACK FILMS


1970년 남자 월드컵이 대흥행에 성공하자, 멕시코는 기세를 몰아 여자 월드컵 대회를 열고자 시도한다. 때마침 여성 축구 경기 금지 조치가 해제(일부 국가 제외)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인 피파(FIFA)는 여성 월드컵 유치 시도에 반발하며 행사 개최에 반대한다. 피파가 돌아서자 각국 축구협회와 연맹들도 이에 뒤따랐다. < 코파71 >에서 인터뷰한 역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남성 중심의 당시 축구계는 몹시 보수적이었으며 남성 임원들의 권위와 결정권이 위협받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피파와 여러 국가 축구협회에 여성 임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이같은 반발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멕시코, 아르헨티나, 덴마크 6개 국가에서 여성 축구 국가대표팀을 결성했고 5개국 선수단은 최초의 여자 월드컵을 위해 멕시코행 비행기를 탔다. 축구화, 경기복 등 용품 협찬도 없었고 일부 팀은 이동을 위한 비용도 제공되지 않아 사비를 털어야 했다.

개막전부터 결승전까지 스타디움에 11만 관중이 꽉 들어찰 정도로 1971년 여자 월드컵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한 경기에 11만 명이라고 하면 지금까지도 역대 여성 축구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수들의 실력 또한 굉장했다. < 코파71 >에 등장하는 여성 축구 대표팀 선수들의 프리킥, 드리블, 슈팅은 당시 남자 월드컵에서 볼 수 있던 명장면과 견주어도 화려했고, 비교하지 않고 보더라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1971년 여자 월드컵은 묻혔다. 멕시코 현지의 응원과 취재 열기는 대단했지만, 그 외 유럽과 북미 국가들은 관심을 주지 않고 보도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약 50년의 여자 축구 경기 금지 조치에 이어서 또다시 50년 동안 여자 월드컵의 역사가 최근까지 묻혀버린 셈이다.

당시 우승팀 덴마크 여성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두 사람, 앤과 비르테는 < 코파71 > 인터뷰 중 "우리의 우승을 (남성 축구의 흥행을 위한) 발판으로조차 이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자 축구 인기 뜨거운 시대, 다시 돌아보는 계보

▲ 영화 < 코파71 > 중 한 장면 ⓒ NEW BLACK FILMS


1971년 여자 월드컵은 국제 축구 기관들의 외면 속에 '비공식' 대회로 잊혀졌다. 이후 20년에 걸쳐 여자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뜨거워졌고, 스포츠계의 인식도 천천히 변해갔다. 결국 1991년이 되어서야 피파가 '승인'한 최초의 공식 여자 월드컵이 열렸고, 미국이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2024년, SBS 예능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들>의 돌풍이 휩쓰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여자 축구의 인기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인 명문 구단 FC 바르셀로나의 구단 박물관에는 팀 레전드 리오넬 메시뿐만 아니라 여성팀 선수들의 명단과 역사도 동등한 비율로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럽을 넘어 북미, 중남미 축구 구단들도 이제는 남성팀과 함께 여성팀을 창단해 운영하고 있다.

다큐 < 코파71 >의 마지막 장면에서, 1971년 월드컵의 주역들이 현재 여성 축구팀의 경기를 TV 중계로 지켜보는 모습은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다. 자신들은 비록 그러지 못했지만, '오늘날 여성 축구 선수들은 멋진 응원과 지원을 받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 그들의 말에 목이 메는 관객이 어디 한둘일까. 인터뷰에 응한 당시 선수들은 무관심과 비웃음에 지쳐 지난 50년 동안 1971년 월드컵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1971년 여자 월드컵의 선구자들을 잊지 않고 계보를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을 위해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 아닐까. 여성 축구가 편견을 넘을 수 있도록, 장벽에 맞서는 시도를 먼저 한 사람들을 말이다. 당시 대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 < 코파71 >을 추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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