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했던 뉴라이트의 부활, 어떻게 가능했나
[분석] 1994년 남북정상회담 반대로 집결한 후 점차 진화... 뿌리는 반공 수구세력
▲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8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있다. ⓒ 남소연
"현재 우리 국민들 수준은 1940년대 영국 국민보다 못하다"는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일제가 쌀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출한 것"이라는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라면서 "친일인명사전을 손보겠다"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 뉴라이트가 장악한 정부 산하 역사 관련 기관 ⓒ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법에는 독립기념관의 목적이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조사·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에 이바지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독립기념관의 목적이 이러함에도 윤 정부는 거꾸로 정반대 성향의 인물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쯤 되면 국민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과 탈선'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역사 관련 주요 기관장을 무리하게 뉴라이트 일색으로 채운 데에는 분명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역사 쿠데타를 기도했던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줄 알았던 뉴라이트가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뉴라이트의 전사(前史)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시발점
뉴라이트는 도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출현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뉴라이트의 시발점을 '뉴라이트 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 목사)이 출범한 2005년 전후로 본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 앞선 1994년이 뉴라이트가 등장한 때라고 생각한다. 3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세력을 확장해 온 것이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라면서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데 이어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제안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남북회담을 관장할 통일부총리에 오랜 민주화 운동 경력을 가진 한완상 교수를 임명했다. 한 부총리는 통일정책의 '국민적 합의'를 위해 반공인사들은 물론 당시 통일운동의 주력이었던 한총련 학생들과 문익환 목사, 임수경씨 등도 잇따라 만났다. 1994년 6월 한반도가 북한 핵문제로 위기상황에 처하면서 이 문제의 타결을 중재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 대통령이 즉각 수락함으로써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역대 정부 출범 때마다 남북정상회담 제안은 단골 메뉴였지만 김영삼 정부의 담대한 통일 정책과 눈앞에 다가온 남북정상회담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이철승을 비롯한 골수 반공 정치인들이었다. 이철승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접어드는 상황을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질 총체적 위기'라면서 우익단체 결성과 잡지 창간 등을 독려했다(조선일보 1994.3.13.) 이 때 이철승 등 극우반공 정치인들이 호명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사실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 후 거의 30년 넘게 잊힌 존재에 불과했다.
이승만을 미화한 영화 〈건국전쟁〉과 다큐 〈기적의 시작〉에서는 하와이 망명 중인 이승만이 1965년 죽음을 앞두고 고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면서 신파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당시 이승만 입국을 막은 자는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이승만 노인은 눈이 어두운 독재자다. 지난날 이승만씨가 꾸며 놓았던 자유당이야말로 자기 파만의 수지타산을 제일로 치는 정당의 본보기였으며, 세계 선거 역사 가운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 우남(이승만)기념사업 활성화모임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4년 7월 1일자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앞둔 1994년 6월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는 '우남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활성화를 위한 모임'이 열렸다. 이들은 모임의 취지를 "70년대 초반에 조직됐지만 그동안 활동이 지지부진해오다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닦은 위인을 푸대접해서는 안된다'는 원로들의 의견이 높아지자 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조선일보 1994.7.1.).
이 자리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윤치영(1898~1996)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로 이승만 정권의 초대 내무부 장관, 박정희 정권 당시 민주공화당 의장 서리를 지냈다. 신현확(1920~2007)은 일제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이승만 정권 부흥부 장관,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안응모(1930~2024)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각각 치안본부장과 내무부 장관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앞자리에 있었다. 신도환(1922~2004)은 이승만 정권 당시 대한반공청년단장으로 1960년 3·15 부정선거 관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신민당에서 활동하여 야당 인사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3·15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다. 홍석현(1949~ ) 중앙일보 사장도 참석했는데 그의 부친인 홍진기(1917~1986)는 4·19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발포 책임자로 지목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된 바 있다. 이도형(1933~2020)은 극우 잡지 <한국논단> 발행인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친북좌파로 비난하는 등 이른바 '사상 검증'으로 유명했다. 지난 날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이 한목소리로 '북진 통일'의 아이콘인 이승만을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다.
김일성 사망에 안도, 본격적인 역사 전쟁 시작
1994년 6월 30일 신라호텔 모임은 이후 한국 뉴라이트의 시작이라 할만하다. 모임 이후 7월 8일 이들에게 김일성 주석 사망이라는 기적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많은 국민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남산 외국인 아파트 철거 등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조선일보>는 광복 50년·조선일보 창간 75주년 특별기획전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를 시작으로 대규모 역사 전쟁에 나섰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즉 '이승만이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뉴라이트의 핵심 강령이 이때 제시된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은 불굴의 항일투사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선견의 정치가로, 세계열강들 가운데서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평생을 나라를 재건하고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대통령, 4·19를 유발한 독재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말년의 과오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1875~1965)가 한국의 근대사였고 역사를 개척한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바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리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사고[社告]로 밝힌 전시회 기획의도, <조선일보> 1995.2.3.)
▲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시회 개막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5년 2월 5일 자 기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당시 이 전시회의 저의를 간파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사가 박정희, 이승만의 복원을 집요하게 추진, 미화하는 것은 상식적인 역사 재조명이 아니라 '개혁'을 보수의 틀 안에 가두어 놓겠다는 구체적인 의도(고성국 나라정책연구회 상임운영위원)
이미 4·19 혁명에 의해서 역사적·국민적 평가가 난 이 대통령의 행적을 새삼스럽게 '건국 대통령'으로 과장·미화하는 것은 과거 50년대와 이해관계가 닿아있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사업(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수구 보수 세력의 위기감이 드러나 보인다(윤종세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 사무처장)
이승만 한 사람만 되살리고 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박혜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반공 정치 세력과 조선일보 등 수구 언론은 남북정상회담 무산을 전후하여 김영삼 대통령 주변에서 통일 정책을 추진했던 한완상 통일부총리와 김정남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에게 집요하게 사상 검증 공세를 펼쳐 결국 이들을 정부와 청와대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즈음 김영삼 정권은 급격한 우경화로 치달았고 이를 입증하는 상징적 사건이 발생한다. 1996년 한총련 주최로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를 정부가 이례적으로 강경 진압해 5848명이 연행되고, 1998년에는 대법원이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언론은 이 같은 강경 진압의 원인을 "보수세력을 결집시켜 차기 집권을 위한 유리한 정세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중앙일보 1996.8.21.).
▲ 이철승, 오제도 등 반공 인사들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전사'를 자처하며 출범한 자유민주민족회의 발족을 보도한 조선일보 1994년 11월 15일 자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반공 정치인과 수구 언론의 결합으로 시작된 뉴라이트는 학생운동에서 이탈한 인사들(1998년 시대정신, 2004년 자유주의연대)이 일부 결합하고 여기에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합세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론장과 학교 현장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1997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소장 유영익)는 2011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으로 변신하며 본색을 노골화하였고, 지금은 이승만학당 등 수많은 이승만 우상화 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중·고등학교의 기존 교과서가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2005년 출현한 교과서 포럼은 대안교과서-교학사 교과서-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를 거쳐 최근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를 통해 부활을 꾀하고 있다.
이들이 역사교육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통성의 자랑스런 역사교육을 후대에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이철승, <동아일보> 1993.6.16.)
이처럼 뉴라이트는 새로운 보수가 아니라 수구세력의 자구 노력이자 기득권 유지를 위한 결집이라 할 수 있다. 뉴라이트의 시작과 그들의 목적을 알고서도 이 역사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까?
헌법을 무기로 뉴라이트에 맞서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무기로 역사 전쟁에 임해야 할까? 필자는 우리 헌법이 뉴라이트에 맞서는 유효한 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헌법은 장식(액세서리)이 아닌 규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국민 생활의 최고 도덕규범이며 정치 생활의 가치규범으로서 정치와 사회질서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 사회에서는 헌법의 규범을 준수하고 그 권위를 보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헌재 1989. 9. 8. 88헌가6).
우리 헌법 전문은 독립, 민주, 평화통일 등 3대 정신을 명확히 천명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 2021년 11월 3일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씨가 수요시위 행사장에 접근해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태극기와 일장기를 흔들고 있다. ⓒ 권우성
즉,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폄훼, 이승만 독재 찬양·미화, 반북 대결 의식 고취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한마디로 반 헌법적이다. 우리는 '국민 생활의 최고 도덕 규범이며 정치 생활의 가치 규범'인 현행 대한민국 헌법을 무기로 반 헌법 세력인 뉴라이트에 맞서야 한다. 이름에 '뉴'가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사조일 수는 없다. '올드 라이트'든 '뉴라이트'든 혼종이든 친일·친독재, 외세 의존, 멸공 통일 등을 본령으로 하는 '초록은 동색'이다. 수구 세력의 기득권 지키기란 측면에서 이들은 모두 과거로의 회귀를 희구하는 반헌법 세력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진보당 기관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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