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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수재들이 몰려들던 동네, 정말 어마어마했다

[윤찬영의 익산 블루스] 익산의 도심 '중앙동'의 흥망

등록|2024.10.23 12:04 수정|2024.10.23 12:04
익산역에 내려 도시의 중심인 중앙동 방향으로 나오면 멀리까지 시원하게 뻗은 4차선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100여 년 전인 1912년 허허벌판에 처음 기차역(옛 이리역)이 들어섰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역 앞마당에서부터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이 새로운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뒤로 도시는 빠르게 번성했다. 1915년 <호남보고(寶庫) 이리안내>를 쓴 야마시타 에이지는 책에서 "정거장(이리역) 앞에는 너구리의 소굴이 갑자기 변하여 사람과 마차가 다니는 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기찻길을 놓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손으로 꼽을 정도이던 이곳 일본인 수는 빠르게 늘어 1911년 224명이 된다. 이듬해 역이 문을 열자 946명으로 네 배가 됐고, 조선인도 1089명으로 늘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셈이다.

▲ 익산역에 내리면 쭉 뻗은 중앙로 왼쪽으로 보청기 광고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중앙정형외과의원 건물이 보인다. ⓒ 윤찬영


하지만 '좋은 시절'은 채 100년을 못 갔다. 누군가는 역 바로 맞은편에 나붙은 보청기 광고 간판이 이 도시의 나이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중앙동은 정말로 조용하다.

보청기 광고 간판 건물 옆엔 '중앙정형외과의원' 건물이 서 있다. 1992년 대한통운 창고가 있던 자리에 새로 건물을 올리고 병원을 열었다. 건물주이자 병원장인 최태훈 원장은 이곳 중앙동 토박이로, 그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중앙동이 걸어온 지난 100여 년의 발자취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인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교통의 도시이자 교육과 소비의 도시, 익산 중앙동

▲ 1912년 문을 연 옛 이리역의 모습 ⓒ 익산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다른 신시가지들처럼 중앙동도 바둑판 모양으로 길이 났고, 길마다 일본 이름이 붙었다. 역 앞마당에서 시작하는, 동쪽으로 길게 난 길은 '일지출정', 이 길을 따라 150m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철길과 나란히 남북으로 난 길은 '영정통'이라 불렀다. 참고로, 1912년에 처음 역이 들어섰던 자리는 지금 익산역 동측 주차장 한 가운데쯤이다.

▲ 일제강점기 이리역 앞 시가지 풍경 ⓒ 익산시

▲ 일제강점기 이리역 앞 시가지 풍경 ⓒ 익산시


역 앞에서 시작된 일지출정을 따라서는 관공서와 금융기관들이, 이 길을 가로지르는 영정통을 따라서는 극장과 술집, 여관을 비롯한 상업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도시는 빠르게 덩치를 키워갔다.

이리좌 - 군산·전주의 극장에 들어가는 제일 흥행물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 없고, 흥행 회수는 두 지역을 능가하는 형세이다. 그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약 400명이다.

철도구락부(클럽) - 물론 철도 국원 전용의 오락장은 아니지만, 국원의 소개에 의해서 다른 사람도 놀 수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매주 토요일 아침 대전에 가요지도자가 와서 노래를 하고 있다.

철도대합소 - (주이용객이) 이 고장 사람들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여행자 등이 정거장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를 이곳에서 쉬게 할 계획이다. 이곳이라면 5분 종소리가 울리고 뛰어 가도 기차를 탈 수 있으니 편리하다.

오노우라 - 이리에서 요리같은 요리를 하는 요정은 우선 이곳이 최고이다. 식칼로 자르는 맛의 신선함으로 요리가 훌륭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한 잔을 더하게 되는 것이 일쑤였다. 특히 냄비가 들어오면 천하일품이라 모두들 혀를 차며 감탄하였다.

중앙동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침저녁으로 역과 거리를 오가던 학생들이다. 도시가 번성하면서 자연스레 근대 교육기관들도 하나둘 생겨났고, 남쪽으로는 김제와 정읍, 북쪽으로는 황등, 함열과 그 너머 충남 강경 그리고 서쪽으로는 군산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학생들이 기찻길을 따라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특히, 1922년 문을 연 관립 이리농림학교는 5년제 전문학교로, 수원농림학교, 진주농림학교와 더불어 당대 조선의 3대 명문으로 꼽히던 곳이다. 이 학교에 들어가려고 전국 각지에서 수재들이 모여들었는데, 익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인 하림그룹의 김홍국 회장과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창업자 고 임대홍 회장이 이 학교를 나왔다.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 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지금 이리농림학교는 전북대학교 특성화캠퍼스다.

▲ 일제강점기 이리농림학교 본관 ⓒ 익산시

▲ 1930년대 이리농림학교 학생들 모습 ⓒ 익산시


최태훈 원장의 아버지도 이리농림학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1926년 전북 군산 옥구면에서 태어난 그는 개정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멀리 이리로 시험을 보러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최 원장의 할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맏이였던 그가 보살펴야 할 어린 동생이 넷이나 있었다.

비록 이리농림학교엔 갈 수 없었지만 그는 이 도시로 건너와 친척의 소개로 영정통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계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술을 익히면서 어머니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해 11월 27일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가져갈 수 있는 물품과 현금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배낭 1개와 양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물건만 허락됐고, 현금은 1000엔까지만 가져갈 수 있었다. 지금 우리 돈으로 따지면 200만 원 정도다.

시계공장 주인은 일본에 가져가 봐야 쓸모도 없는 땅문서와 집문서를 가장 믿을 만한 직원이던 최 원장 아버지에게 맡기고 떠났다.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없지 않았을 터. 하지만 다시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없었고, 땅과 공장은 이른바 '적산'으로 분류돼 미군정이 세운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를 거쳐 최 원장 아버지 몫으로 넘겨진다.

미군정은 주택 8만 2000여 채, 100만 엔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 500여 개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경지 32만여 정보 등을 민간에 팔았는데,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먼저 넘겼듯 종업원들에게도 사업체를 먼저 살 수 있게 해줬다. 불하대금도 15년까지 나눠서 낼 수 있게 했다.

최 원장 아버지는 시계공장 자리에 새로 가게를 열고 서울에서 시계를 떼다 팔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중앙동의 전성기

▲ 1980년대 익산역 앞 풍경 ⓒ 익산시


해방 뒤에도 중앙동은 여전히 번성했다.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중앙동을 키운 건 '교통과 교육'이었다고 잘라 말한다. 교육의 도시는 곧 문화의 도시이자 소비의 도시이기도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학교와 학생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은행과 상점이 생겨요. 인터넷뱅킹도 없던 시절이니 공납금이 오가려면 가까운 곳에 은행이 필요하니까요. 또 그 시절 조금 사는 집에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아들들에겐 세이코 시계 하나 정도는 사줬고, 딸들에겐 금반지 같은 걸 해줬어요. 학교 졸업할 때면 양복 한 벌씩 맞춰줬고. 그 모든 게 여기 중앙동에서 이뤄졌어요. 그래서 금은방, 양복점, 라사점(옷감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 등이 정말 많았죠."

▲ 1970년대 옛 이리역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학생들의 모습 ⓒ 익산시


1955년 중앙동에서 태어나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던 현주억 대표의 기억도 같다.

"촌에서 이리로 참 많이 왔어요. 뭐 물건도 사고 통학하려고 많이들 왔죠. 김제, 신태인, 군산, 전주 할 것 없이 많이들 왔어. 학교가 많으니까 교육도시라는 그 프리미엄이 있었어요. 익산 하면 그때는 교통도시, 교육도시 이렇게 얘기들 했었어요. 학생이 많으니까.

역이 생기고 발달하면서부터 학교가 이리에 몰려서 개교했어요. 중고등학교가 공고, 이리고, 남고, 이리여고, 남성여고, 다 이쪽 중앙동, 창인동에 있어요. 원여고는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그러니까 학생들이 역에서 내리면 그 철인동이라고 하는 그쪽 도로로 쭉 올라가는 거예요."

▲ 1970년대 이리역 광장 새벽 청소에 참가한 학생들의 모습 ⓒ 익산시


중앙동에서 가장 목 좋은 자리엔 이도백화점이 있었다. 익산 향토기업인 쌍방울 이봉영 대표가 1980년대에 설립한 익산의 첫 백화점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처음 놓인 건물이기도 했다. 중앙초를 거쳐 이리동중과 이리공고를 졸업한 손수길 전 익산시장애인체육회 이사는 이곳이 학창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주로 놀던 곳으로 삼남극장 아래로 '샘터'라는 분식집이 유명했어요. 지구음악감상실에서 좀 더 내려오면 삼남극장 바로 옆 골목을 끼고 '은영의 집'이 있었어요. 이게 1순위고 저 뭐야 짱들한테 밀리면 시공관 앞에 '태양의 집'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거기도 똑같은 음악감상실이었어요. 은영의 집 다음에 생긴 집이 태양의 집이야. 거기가 튀김도 팔고 하는데, 하여간 그 1진들이 샘터, 은영의 집을 차지하면, 2진들 정도 되는 애들은 미팅 같은 것도 하는 고려당 빵집이 있었어."

▲ 익산역 옆으로 나있던 굴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 ⓒ 익산시


중앙동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강숙자씨는 "중앙로 양쪽 골목부터 저쪽까지 다 금은방이었다"고 했다.

"촌에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촌사람들이 이리 와서 돈을 썼어. 김제, 만경, 청하, 백구, 금마, 신태인, 강경... 하이고, 가을에 그때가 제일 장사가 잘 됐지. 그때가 사람들이 결혼들 많이 했잖아. 결혼까지 하니까 영정통이 농촌도시의 한복판이었어. 촌에서 사람들이 와서 먹고, 술집이고 뭐고 다 돈 쓰고 했어. 그때 여기가 좋았다니까."

그는 여러 금은방들 가운데 '중앙사'를 첫손에 꼽았는데, 그 중앙사가 바로 최태훈 원장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금은방이다. 시계방으로 시작한 중앙사는 얼마 뒤 금은방으로 업종을 바꿨고 나날이 번창했다. 한창땐 도심의 모든 가게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세금을 많이 냈다고 한다.

▲ 옛 중앙사 자리. 지금도 일제강점기 때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2층엔 한자와 영어로 적힌 '중앙사' 흔적이 선명하다. ⓒ 윤찬영


중앙동의 쇠락, 그리고 다시 살리려는 안간힘

현주억 대표는 "1994년 무렵까지도 중앙동 거리엔 새벽 3시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고 기억한다.

"영정통, 삼남극장 밑에 뉴타운백화점 밑에서 이리극장까지... 거기는 사람들 정말 많았어요. 흔히 하는 얘기로 '한강 이남에서 제일 사람 많은 동네'라고 그랬거든요. 사람들끼리 서로 부딪쳐서 못 갔으니까. 보통 낮이고 밤이고 사람이 항상 많았죠."

최 원장이 1992년 역 앞 큰길에 5층짜리 번듯한 건물을 올릴 때만 해도 중앙동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29개에 달하던 병상이 늘 환자로 가득 찼다고 했다. 많을 땐 간호사 10여 명에 물리치료사 3명 등 15명 넘는 직원을 둔 적도 있었다. 지하층은 물리치료실로, 2층 진료실에 더해 3,4층도 입원실로 썼으니 병원이 4개 층을 썼던 셈이다.

▲ 일지출정으로 시작해 오랜 세월 중앙동의 중심도로였던 길 ⓒ 윤찬영


하지만 '좋은 시절'은 생각보다 짧았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앙동은 빠르게 활기를 잃어갔다. 도심 외곽 영등지구와 부송지구 그리고 모현지구가 잇따라 개발되면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탓이 크다. 기차의 시대가 저물고 자동차의 시대가 찾아온 것도 한몫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기찻길을 따라 움직이지 않게 됐다.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중앙사도 2000년대 들어 문을 닫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최 원장 형제들이 물려받아 운영하기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이후 익산역사 위치를 옮기면서 그 앞으로 4차선 도로를 새로 냈다. ⓒ 윤찬영

▲ 영정통이라 불리던 번화가의 북쪽 끝. 삼남극장, 제일대극장 등이 있던 골목이다. ⓒ 윤찬영


지금도 익산 사람들은 중앙동을 '시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온갖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다. 신귀백 소장은 "한 마디로 호남북부권역의 원스톱 서비스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내에 있던 은행들이 지난 몇 년 사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에 있던 IBK기업은행을 비롯해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이 떠난 지 오래고, 조선식산은행 자리에 들어섰던 SC제일은행도 올해 초 조용히 문을 닫았다. 1958년 이리시 인구의 약 10%가 살던 중앙동엔 지금은 겨우 1% 남짓만이 살고 있다. 처음부터 주거지역이라기보다는 상업지구에 가깝긴 했지만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던 골목엔 문 닫은 지 한참이 지난 빈 공간들이 수두룩하다.

최근 시는 중앙동을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 두 달 사이 옛 영정통 거리에선 두 개의 축제가 열렸다. 이리극장이 있던 남쪽 골목에선 '중앙동 치맥 페스티벌'이, 삼남극장이 있던 북쪽 골목에선 '청년의 날 축제'가 열렸다. 익산 향토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하림과 삼양식품이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중앙정형외과의원도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최태훈 원장은 2층에서 진료와 엑스레이촬영 그리고 간단한 물리치료를 혼자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물리치료실과 입원실은 모두 쓰지 않은 지 오래다. 1952년에 태어난 최 원장도 어느덧 일흔둘이다. 이 앞을 지날 때면 옛 이리역과 이리농림학교에서 시작해 중앙사를 거쳐 중앙정형외과의원으로 이어진 중앙동의 탄생과 번성 그리고 쇠락의 긴 발자취가 떠오른다.

▲ 일제강점기 영정통 풍경 ⓒ 익산시

▲ 이리국민학교 학생들이 중앙동에서 가두행진을 하던 모습 ⓒ 익산시


'좋은 시절'이 가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도시는 힘을 잃지만 그렇다고 도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짙게 배어있는 도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그곳만의 매력을 품고 있기도 하다.

도시가 어떻게 태어나 번성했으며, 또 저물었는지를 알고 다가가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도시의 풍경이 더 애틋하고 정겹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겐 익산의 도심 중앙동이 꼭 그렇다.
덧붙이는 글 [참고한 글]
신귀백 외, <이야기로 듣는 이리ㆍ익산 그리고 사람들III – 이리사람들 100년의 생활사>(2020), 익산시.
야마시타 에이지, <호남보고 이리안내>(2022), 전북연구원.
오하시 소쿠죠, <조선주재 36년>(2020),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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