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 6주기, 그녀의 시 읽기와 기억하기는 계속"
3일 저녁 진주문고 여서재 '6주기 추모' 행사... 시낭송, 추모공연 등 벌어져
▲ 3일 저녁 진주문고 여서재에서 열린 고 허수경 시인 6주기 추모식. ⓒ 최세현
"타국 고고학 발굴지에서 온 몸을 던지면서도 모국어로 된 시를 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시인이다. 그녀의 시를 읽고 기억하는 일이 계속 되었으면 한다."
독일에 유학해 '고대동방고고학'을 공부했던 고(故) 허수경(1964~2018) 시인의 6주기를 맞아, 3일 저녁 진주문고 여서재에서 열린 추모식을 진행했던 성순옥 재능교육교사가 한 말이다.
김태린 전 진주민예총 회장이 "시인을 위한 헌무", 노래패 맥박이 고인의 시에 곡(이마주)을 붙인 "바다가"를 불렀고, 최세현, 정물결, 정진남, 하미옥, 조현수씨가 고인의 시를 낭송했다.
경상국립대 문학동아리(전원문학) 선배인 황주호 교사는 "열 아홉 살 허수경"을 기억했다. 1982년 10월 말 대학축제(개척제) 때 열었던 전원문학의 시화전‧문학의밤 행사를 마친 뒤 일화를 '소환'했다.
그는 "시내 한 여관 3층의 제일 큰 방에서 뒤풀이가 시작되었고, 합평회 열기보다 술기운이 더 빨리 올라 지금까지 많이 봐왔던 기행들이 벌어지려 할 무렵 그날의 제일 '어른'인 저는 여학생들은 빨리 귀가하라고 눈치를 주었다"라며 "하지만 시화작품에서나 시낭송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1학년 허수경 학생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제 가까이 불렀다"라고 했다.
당시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한 선배는 "그날 이후부터 허 시인이 등단하기까지 오륙년 동안 그와 나는 전원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시를 찾아 구도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이 되었다"라며 "그때 나는 단순히 선배라는 이유로, 청소년기에 몸이 급하게 성장하면서 관절통이나 기흉이 생기는 것처럼, 생물학적 나이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시어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후배를 보며 조마조마해 했던 것 같다"라고 했다.
88올림픽이 열렸던 해에 나온 허 시인의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거론한 그는 "문학이라는 장거리 경주의 장에서 허 시인을 포함하여 뛰어난 후배들이 앞서 달리는 것을 보면서 기뻤다"라고 했다.
대학 선배(1972학번)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이인희 박사는 보내온 추모글을 통해 "아무래도 내가 갱상대(경상국립대) 선배라 일찍 세상을 떠난 후배가 너무 안대서 그럴끼고"라며 "진주를 떠나, 한반도를 떠나 미국에 살아온 지 세월이 수악하게 가삣고, 국문학 대신 영문학 하니라 바빠서, 얼마 전에사 소개를 받고 알게 된 님의 이름, 그리고 시"라고 했다.
이어 "머리와 가슴을 한 대 맞은 듯한, 여자가 벌레를 묵어야 에뻐진다꼬 오밤중에 불 꺼 놓고 묵던 진주 복숭아, 겉이 흥건하고 달콤하고 아찔한. 우째서, 시를 이리도, 에나로, 진짜로, 참말로 잘 쓰는 사람도 죽노? 내 인생의 핫 토픽인 '진주, 갱상대, 그리고 시'라며 "칠순이 넘은 지금, 나의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이런 것들이. 님의 가슴에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남아 있었으리라 짐작이 쉽게 갑니다. 그리고 타국살이, 고고학"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나도 박사학위 마친 뒤, 다시 공부할 수 있다면 고고학을 하고 싶었는데, 아니 갱상도 진주 문디 반편 가수나들은 타국에만 오모, 와, 박사하고,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을꼬? 희안하제. 님은 멀 그리 발굴하고 싶었을꼬? 발굴터에 앉아서 이런 말 할라꼬?"라며 "'시간은 지층 속에서 몇 센티, 몇 밀리미터로 남을까. 그 안에서의 나의 괴로움, 상처는 아떤 흔적으로 남을까.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겠죠.' 설마 그렇더라도 그냥 님을 보낼라카이 와 이리 가슴이 에리는지. 타국 땅. 수목장. 독일이라카이, 와, 좀 서글푸네. 갱상도 진주 사람인데. 님의 재는 시로 가득했을낀데. 나무가 시가 되고 그런긴가"라고 했다.
그는 "살아 생전에 만나서 진주에서 한 잔 했시모 좋았을낀데. '꽃밥(진주비빔밥)'도 묵고이"라며 "제국의 미국 땅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데모 다니는 날들. 저항꾼 하마스, 동학꾼, 농민전쟁, 녹두장군, 진주농민항쟁. 또 저 먼 땅에 묻힌 시인 생각하며"라고 했다.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시인의 가족인 허훈(동생)씨가 지난 추석 앞에 세상을 뜬 어머니와 함께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인사했다.
2018년 10월 3일 독일 땅에서 눈을 감아 묻혀 있는 허수경 시인은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 문학상을 받았고, 많은 작품집을 남겼다.
시집 :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 2001),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문학과지성사, 2023).
산문집 : <길모퉁이의 중국식당>(문학동네, 2003),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 2018), <너 없이 걸었다>(난다, 2015), <모래도시를 찾아서>(현대문학, 2005),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난다, 2018),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 2019), <오늘의 착각>(난다, 2020),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난다, 2020).
소설 : <모래도시<(문학동네, 1996), <아틀란티스야, 잘 가>(문학동네, 2011), <박하>(문학동네, 2011).
동화 :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한양출판, 1994) (난다, 2021, 개정판), <마루호리의 비밀>(파랑새, 2008).
다음은 최세현(산청)씨가 낭송한 허수경 시인의 시 "이 가을의 무늬" 전문이다.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살짝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 3일 저녁 진주문고 여서재에서 열린 고 허수경 시인 6주기 추모식. ⓒ 최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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