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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망하는 게 신기한, 8년째 생존 중인 이 서점

'텍스트힙'에 대한 단상... 숏폼 영상 범람 중인 요즘, 폰은 책을 이길까

등록|2024.10.04 17:43 수정|2024.10.04 20:29
부동산과 음식점으로 빼곡한 서울 은평구 대조동 연서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골목길의 낭만에 빠져 걷고 있으면 엉뚱한 장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가와 가정집 사이, 온통 초록색으로 도배한 채 손님 발걸음을 애타게 기다리는 곳. 커다란 도라에몽 인형이 입구에 앉아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진중하게 지켜보는 곳.

"책을 펴야 인생편다"라는 자극적인 표어가 크게 내걸린 곳. 과연 제때 월세나 전기요금을 내고 있는지 의문을 자아내는 곳. 내가 주말마다 시간제 노동을 하는 소중한 일터, '니은서점'이다.

대조동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이곳의 365일은 대체로 같은 풍경이다. 계절마다 서점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봄엔 비발디와 바흐, 모차르트의 경쾌함으로, 여름엔 테일러 스위프트와 마이클 잭슨, 뉴진스의 활기로, 가을엔 브람스와 베토벤, 말러, 백예린과 권진아의 외로움으로, 겨울엔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와 빙 크로스비 캐롤의 아련함으로.

텍스트힙과 문자의 종언, 책은 죽었다?

▲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니은서점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니은서점 ⓒ 정선호


사회학자 노명우 선생이 운영하는 이 작은 서점의 서가는 어떤 결기로 가득하다. 나무 결을 살려 지은 책장은 따뜻해 보이지만 책이 쏟아내는 지성의 언어는 날이 서있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마거릿 애트우드, 하이데거, 톨스토이, 마르크스, 푸코, 아도르노, 아렌트, 박완서, 프리모 레비, 양귀자, 박경리, 찬쉐, 이청준.

그렇다. 니은서점은 장사를 포기한 업장! 어렵게 들어온 손님도 다시 골목길로 밀어내는 곳! 다시 말해 '인문사회과학예술전문'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망할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뚫고 서점이 생존한 지 8년이 지나자 내 궁금증은 참을 수 없이 부풀었다.

"아니 어떻게 안 망하지? 어떻게 아직도 '읽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텍스트힙'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를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의뢰가 왔을 때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어쩌면 니은서점이 아직 망하지 않은 이유를 본격적으로 궁리해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편 세속적 욕망에 기쁘기도 했다. 만약 텍스트힙이라는 현상이 오래 유지된다면 작가를 자청하는 나로서는 먹고 살 방도를 확보하는 것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사양산업에 뛰어들어 놓고 마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음, 글쎄. 아마 단단히 믿는 구석 하나쯤 있을 게다.

텍스트힙Text-hip. 글이나 읽을 것 따위를 의미하는 'Text'와 유행하는 고유한 멋을 뜻하는 'Hip'의 합성어. 한마디로 말하면 "글을 읽는 일, 책을 읽는 행위가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힙'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일군의 무리 혹은 그러한 현상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힙의 특성은 고유함이다.

그간 책을 읽는 사람은 꾸준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이 '힙'의 영역으로 나아간 이유는 뭘까. 그만큼 텍스트가 주류 미디어의 영역에서 비켜났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사람들에게 글과 책은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쓰는 일은 탁월한 재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읽는 일은 정규 교육과정 12년으로 충분하다. 뭘 더 요구하나? 할 만큼 한 것이 아닌가.

반면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직관적이다. 짧은 릴스와 쇼츠, 이미지 안에 완벽한 기승전결, 수미상관, 서사와 밈이 담겨있다. SNS는 진지한 요리사라기보다는 자판기에 가깝다. 원하는 걸 말하면 최대한 단시간 안에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나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거나 혹은 읽을 생각이라면 뭐 하러 유튜브에 들어가 '《제2의 성》 요약', '《정의란 무엇인가》 핵심'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겠는가.

자, 아무래도 '주적'을 확인한 듯하다. 대한민국 성인 중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다수라는 뉴스가 머릴 아프게 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문해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으면 스트레스다.

사람들이 단어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아, 이들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는 자들이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소리친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타도하라!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빼앗아라!"
"사대부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

말이 선명한데, 어쩐지 쉽게 긍정할 수 없었다. 뒷맛이 씁쓸했다. 인간은 결국 기술과 도구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노예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으니 거짓으로 주인 행세하는 자들을 죽이면 행복한 결말이 찾아올 것이란 얘기인가. 되묻고 되묻자 다른 그림이 나타났다.

내 질문은 시작부터 잘못이었다. '어떻게 SNS 시대에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지' 물어서는 안됐다. '도대체 인간에게 '읽는 것'이 무엇이길래 아직도 독서라는 비합리적 행위를 하고 있는지'라고 물어야 했다.

SNS가 없어 자신만의 힙을 드러낼 수도 없었던 시절에도, 흥미로운 것이 너무나 많지 않았던가. 거기 몰입하기에도 일생이 짧은데 왜 단어와 문장과 단락과 글을 묶어 책을 만들고 나아가 그것을 읽는 비효율을 아직까지 감수하고 있냐는 말이다.

당장 역사를 돌아보자. 인간이 책을 만들어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 독서의 쇠퇴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꾸준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에 접속해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 조선 후기 《정조실록》을 살펴보라.

"작금의 세태를 보면 사대부를 자청하는 자들이 당최 책을 읽지 않고 공부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니 종묘사직이 곧 망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상소와 대소신료의 언사가 한가득이다. 그때도 책을 읽는 일에 열중하는 사대부들은 텍스트힙이었던 셈이다.

'마침내' SNS가 책을 이길까

어쩌면 텍스트힙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유행이라고 말을 만들어 붙이거나, 몇몇 구체적 사례를 매우 보편적인 삶의 양태라고 낙인찍는 호사가들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허상은 아닐까.

그러니까, 상상 속의 인물들. '분수에 어긋나는 오마카세와 명품을 즐기고 있다는 허영심으로 가득한 여성들'. '아이폰이 아니면 안 된다며 갤럭시를 혐오한다는 아이들'. '젊은 사람을 향해 지하철에서 지팡이를 휘둘렀다고 하는 노인들'. '차별이 지긋지긋해 '일반인'의 삶에 지장을 끼쳤다는 장애인의 투쟁'. '파업을 해 국가경제에 막심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노동자들'. '그저 뽐내려는 욕심으로 책을 읽는 척하는 요즘 것들'. 이 섣부른 일반화와 협소한 규정들.

'마침내' 스마트폰은 책을 이길까? 쇼츠와 틱톡, 유튜브가 책을 이길까? 불가능하다. 호모 사피엔스에겐 잠재된 욕구, 타인에게 접근하려는 욕구,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문자에 접근해 감정이 바뀌고, 지식에 다가가는 쾌감을 느껴본 사람은 읽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첨단 기술이 생기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지닌 인간들은 책을 읽을 것이다. 인간에게 문자가 주는 고유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텍스트힙이라는 말은 어쩌면 농담이다. 어떤 인간들은 언제나, 항상, 일상처럼 책을 읽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소리칠 수 있다. 책을 읽는 소수의 동료를 향해, "저 여기 있어요!"라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은 죄가 없다. 언제나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 다른 세계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했을 뿐이다. 텍스트힙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나는 다만 자그마하게 속삭인다.

"읽지 않는 사람을 이해한다. 존중한다. 그러나 사랑할 수는 없다."
덧붙이는 글 글 정선호 작가, 니은서점 북텐더.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10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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