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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모두 털어간 일본, 이 탑은 가져가지 못한 까닭

간송미술관에서 만난 '미인도'와 '훈민정음 해례본', 짧았던 대구 여행기

등록|2024.10.04 13:59 수정|2024.10.04 13:59
지난 2일은 대구에 가는 날이었다. 어제(1일)는 국군의 날, 내일(3일)은 개천절, 퐁당퐁당 연휴의 시기에 머나먼 곳 대구로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달구벌의 시민들을 만나, 빛고을과 달구벌의 정을 쌓기 위함이다. 오늘 예정된 강연을 위해 두 달 전부터 대구 친구들은 수고하였고, 광주에서도 오늘의 강연을 위해 적잖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로 하였다.

차를 렌트했다. 연예인들이나 탈 법한 멋있는 승합차에 앉으니, 광주에서 출발하는 이 차가 마치 대구에 가 큰 공연이나 치르는 듯싶었다. "차가 너무 멋져요." 모두 차가 좋다며 탄성을 질렀다.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오늘의 대구 강연을 응원하기 위해 동승한 인문연구원 회원들의 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최근에 문을 연 대구 간송미술관에 가보자는 것이 그들의 속내였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고,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를 보자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서둘렀나. 회원들은 금세 다 모였다. 차는 담양을 거쳐 이내 88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개 모집할 걸 그랬어요." 가을 하늘은 청명하였고, 회원들은 소풍가는 아이들마냥 약간씩은 들떠 있었다. 지리산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도 먹고 커피 한 잔 기울이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다. 차를 임대했다는 것은 시간을 임대했음을 의미했다.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시간의 여유를 만끽하였다.

민주화운동 동지와 함께한 간송미술관 관람

▲ 대구간송미술관 외부 전경. ⓒ 김용관


대구 강연을 준비한 이는 김현근씨다. 이제는 대구 민주진영의 원로 인사가 된 김현근은 나의 옛 벗 고우(故友)이다. 1978년 6월, 광화문 시위라는 게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당시의 긴급조치 9호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던 시위를 청와대 목구멍 밑인 광화문에서 감행했다.

친구 김현근은 이 시위에서 앞장을 서다 감옥에 갔다. 다시 1978년 10월, 2차 광화문 시위를 우리는 기획했다. 나는 이 2차 시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으니 김현근과 나는 '광화문 시위의 동지'인 셈이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도 우리는 함께 노동운동을 하였다. 일제 강점 36년의 세월이 긴 시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와 김현근은 민주화운동 46년의 세월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차가 대구의 수성구에 당도했고, 친구는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었다. 시월의 가을은 으레 천고마비의 가을이건만, 오늘의 대구 하늘은 유난히 맑고 햇살은 눈이 부셨다. 역시 간송미술관이었다. 멀리 팔공산 산줄기가 대구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고, 팔공산의 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간송미술관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구는 광주와 달리 도시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예,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야 됩니다. 머리에 올린 이 가체 있잖습니까? 자세히 보시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붓으로 그린 것을 알 수 있어예. 가슴엔 찬 저 호박노리개 보세요. 얼마나 생동감이 있습니꺼? 빛이 나잖아요. 이게 진품 미인도의 맛이 아니겠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안내자의 해설을 들으니 미인도의 멋이 달리 보였다. 간송미술관을 안내하는 이는 허경도 박사(고문화재 수리가)이다. 20대 때에는 대구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30대 때에는 진보정당운동의 앞장을 맡았다. 대구 달성구에서 박근혜와 한 판 선거 싸움을 벌인 나의 후배이다. 40대 때부터는 한옥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후 문화재 관리사가 되었고, 지금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고건축을 강의하고 있다. 음성이 카랑카랑하여 듣는 이에게 쾌활한 기운을 주는 친구이다.

우리는 허경도 박사의 안내를 받아 훈민정음 해례본 앞에 섰다.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앞에 서니, 왠지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훈민정음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우리들은 학교 종이 땡땡 치면 "I am a boy. You are a girl." 씨불이지 않았을까? 도시의 온갖 간판이 영어 단어를 쓰고 있는 이 망국의 시대에 훈민정음 원본 앞에 서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저 해례본을 찍은 목판이 소백산 어느 절에 소장되어 있었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그 절을 불태우면서, 하나밖에 없던 해례본 목판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허경도 박사에게 여정남 흉상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여정남은 경북대 출신 민주인사인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선고 다음 날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여정남 선배의 흉상이 경북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낯선 대구에 혼자 와서 참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 경북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후배 허경도를 만나니, 만사 제치고 참배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경북대학교에서 만난 민주화운동가 여정남 흉상

▲ 대구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훈민정음 해례본 ⓒ 조정훈


임대차는 역시 편했다. 뜻대로 갈 수 있는 것이 렌트카였다. 경북대 정문에 들어서니 저쪽에서 대학생들의 흥겨운 노래가 들렸고, 젊은이들의 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을 축제가 벌어지고 있나 보다. 어렵지 않게 여정남 흉상 앞에 섰다.

"이게 있잖아요. 지금은 여정남 흉상이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말입니다. 1995년도에 우리가(경북대 학생회)가 처음으로 여정남 추모비를 이 풀밭에 세웠지 않았습니까? 어느 날 와서 보니 경찰이 그 추모비를 캐서 없애버렸어예. 2000년에 와서야 지금의 여정남 추모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지예."

우리는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햇살은 유난히 맑아 사진 찍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경북대 교정엔 경북대 박물관 안에 다 안치하지 못한 유적들, 탑이며 불상들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이 탑은 있잖아예, 고려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기단의 용 모습이 아주 정교하잖아요. 근데 말입니더. 일본애들이 1945년 8월 초, 소장하고 있던 우리의 그림, 문화재를 일본으로 다 가져가면서 말입니더. 이 탑은 무거워서 운송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간 것 아닙니꺼? 나중에 발견하여 지금 이곳으로 옮겨온 거지예."

훈민정음 목판본의 소실과 지금 보는 불탑의 비사는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였다. 제법 걸었다. 서서히 몸이 지치기 시작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강연은 내가 쓴 책 <시민군>의 이야기를 달구벌에 전하는 자리이다. 이조훈 감독이 제작한 독립영화 <송암동>을 상영하고, 이후 감독과 작가의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달빛 동맹'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달구벌과 빛고을의 연대를 뜻하는 용어이다. 빛고을에 있었던 그날의 진실을 달구벌에 전하고, 오늘처럼 달구벌의 문화재를 보는 것은 '달빛 동맹'의 한 예일 것이다.

"저는 이 책 <시민군>에서 1980년 5월 도청을 지킨 300여 시민군의 육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이 국졸자, 중퇴자였던지라 만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죽음이 촌각에 달린 그 시각,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청을 지켰을까요?

내가 책으로 알았던 오월 이야기가 많은 대목이 잘못 기술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작가가 오히려 진실을 변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대단히 훌륭한 오월 보고서입니다만, 작자가 전지전능한 신을 자처하면서, 시민군들을 장기판의 졸(卒)로 취급하는 위험한 관점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임철우의 <봄날> 역시 대표적인 오월 소설입니다만, 윤상원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역으로 시민군을 항쟁의 엑스트라로 취급하는 우를 초래하였더군요."

할 말은 많았고 시간은 짧았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인지라 대화의 자리는 더욱 바빴다. 우리는 마저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순대국 집으로 옮겨서 나누었다. 김정규 교수, 김경남 교수, 송필경 원장, 조덕호 교수, 김해서 교사. 이번의 만남으로 풀지 못한 우정을 다음 기회에서 더 나누기로 약조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황광우(작가,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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