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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뇌일혈로 쓰러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27] 난초를 기르며 건강의 회복에 진력했으나 회복은 늦었다

등록|2024.10.10 16:59 수정|2024.10.10 16:59

모정과 연못모정 앞에 조그만한 연못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오명관


나이를 먹어도 노쇄하지 않는 불사조처럼, 강의를 하고 원고를 쓰고 강연을 하면서 노익장을 보여주었다. 전북대학 정년 퇴임 후 다시 서울 생활을 하면서 전주의 옛 보금자리를 유지하였다. 전북대학에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 4월 18일 학술원 추천회원에 위촉되고, 현대출판사에서 <시조의 개설과 창작>을 펴내었다. 한 해 전에는 백철과 공저로 <표준 국문학사>를 출간하였다. 이 외에 이병도와 공편 <조선역대여류문집>을 을유문화사에서 <어우야담(於于野談)>(국제문화관), <근조내간선(近朝內簡選)>(국제문화사),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백양당) 등을 저술 또는 찬술하여 우리 국문학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그동안의 업무가 너무 과도한 것이었는지, 68세이던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한글학회 편찬의 <우리말 큰사전>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귀가 도중, 계동 입구의 노상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병세가 좋지 않아서 출강하던 대학에 사직서를 보내고 투병에 전념하였다.

장독대안채와 사랑채 뒤에 대나무 숲과 아울러 장독대가 있다. ⓒ 오명관


1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난초를 기르며 건강의 회복에 진력했으나 회복은 늦었다.

와병 초에는 언어 기능의 마비 등 중태였으나 차츰 회복이 되자 다시 대학원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강의를 하였다. 1958년 3월로 대학원 강의도 마무리 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병환 조리를 하는 중에도 학술원 공로상(1960)과 문화포장(1962)이 수여되었고, 전북대학교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1961) 그리고 서울과 전주에 가끔 나들이도 하였다.

1963년 전라북도에서 정읍군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던 바, 가람은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3일, 이 탑이 완성되어 제막식을 가질 때, 가람은 이 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주석 1)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조에 심회가 담긴다.

백 묵

몸을 담아 두어 마음은 돌과 같다
봄이 오고 감도 아랑곳 없을러니
바람에 날려든 꽃이 뜰 위에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도다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 손에 백묵을 듣고 가슴 아파 하여라. (주석 2)

병 석

비인 마룻장에 해가 가득 비쳐들고
후루룩 내려 앉아 짹짹이는 참새들을
이 놈과 저 놈의 소리 들어보고 알리라

분에 옮긴 국화 빼어 나온 두 송이
어인 병에 들어 찬바람을 이는 이 때
피랴다 피들 못하고 시들시들 하느뇨. (주석 3)

고곰(학질)

몸이 한가로우애 도리어 병은 잦다
보던 글 던져 두고 상머리 홀로 누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잔시름만 하도다

몸이 아픈 곳을 스스로 헬 수 없고
깃보다 가벼운 맘 허공으로 떠오르노니
흐릿한 별과 구름은 머리맡에 어르이다. (주석 4)


주석
1> 최승범, 앞의 책, 66쪽.
2> <가람 시조산>, 63쪽.
3> 앞의 책, 64쪽.
4> 앞의 책, 6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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