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남자 친구의 심장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
[넘버링 무비 393]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이별, 그 뒤에도>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이별, 그 뒤에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어떤 작품은 하나의 신(Scene)만으로도 오래 기억된다. 이전에 없던 기술을 선보이며 관객의 충격을 불러일으키거나 작품 속 다른 모든 장면을 잊게 할 만큼 강하고 짙은 인상을 남기거나.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이별, 그 뒤에도>의 시작도 그런 쪽에 속한다. 떨림과 설렘, 사랑이라는 이름의 단어가 고점에 놓여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집약해 놓은 듯한 두 인물 유스케(이쿠타 토마 분)와 사에코(아리무라 카스미 분)의 모습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이야기의 출발은 그 마음을 부수고 또 부수어 잘게 뜯어낸 뒤에 그 발끝 아래에 흩어놓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 오프닝신이 사랑의 찬가로 기억되는 일과는 별개로 극의 서사는 사랑의 기적이 붕괴한 폐허의 자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02.
전체 이야기의 25%에 해당하는 1화와 2화의 전개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94분 남짓한 상영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각 인물의 서사를 매우 단단히 쌓아가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가 남긴 어떤 오브젝트, 그리고 그를 통한 새로운 인연의 서사는 사실 멜로 드라마 장르에서 오래 활용되어 온 장르적 서사에 가깝다. 다만 이러한 구조의 경우 이미 정해져 있는 결말에서의 장면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데 반해, 이 드라마는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쌓아가는 서사의 결과물로서 하나의 결말을 완성하고자 하는 느낌. 이 작품이 주는 가장 처음의 이미지다.
"내 눈앞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해도 결국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실제로 1화의 내용 전체를 통해서는 유스케와 사에코 두 사람의 서사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밀도 있게 전개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와 연인으로 관계를 발전시키기까지의 이야기가 조금의 공백도 없이 찬찬히 이어진다. 물론 2화에서 드러나게 될 카즈와 미키(나카무라 유리 분) 부부와의 작은 연결고리는 조금씩 제시된다. 세상을 떠난 유스케로부터 심장을 이식받은 카즈가 익명으로 (장기 이식 제공자 가족과 수혜자는 서로의 정보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편지를 보내오는 장면 등을 통해서다.
2화에서는 카즈와 미키의 이야기가 앞서 구축된 유스케와 사에코의 서사 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처음 장면에서 카즈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찾아온 미키가 창밖으로 불꽃놀이가 보인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장면이 1화와 연결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서 각각의 서사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쌓이고 있다는 뜻이 그 과정 동안 다른 서사를 잊혀지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은 아니다. 각자의 서사가 축적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충분히 소통하며 교류되고 있으므로 8부작이라는 (영화에 비해) 긴 호흡 속에서도 이야기 간의 단절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이별, 그 뒤에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 또한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지점이다. 유스케와 사에코가 사랑의 감정을 시작하게 되는 공간이자 이루어지지는 못하지만 카즈와 사에코가 스치듯 지나치게 되는 하와이. 다시 유스케와 사에코가 현생에서의 인연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서로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는 배경이자 카즈가 오랜 시간 심장 문제로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던 홋카이도 지역. 이 두 지역은 계절로 따지자면 각각 여름과 겨울을 상징하는 장소로 극 중에서 의미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쿠로사키 히로시 감독에 따르면, 이 두 지역을 그의 대비적 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첫째는 해와 달로 대변될 수 있는 두 남자 주인공 유스케와 카즈를 이미지적으로 더 표현해 내기 위해서다. 하와이의 뜨겁고 열정적인 분위기와 홋카이도 지역의 차가우면서도 차분한 이미지는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성격과 행동 양식을 대변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 하와이에서 만난 유스케와 사에코 커플이 홋카이도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홋카이도에서 지내던 카즈와 미키 커플이 건강을 회복한 뒤에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다는 점은 끊임없이 교환되는 양 측 서사의 복선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지역이 가진 물리적 속성을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있다. 대체로 날씨가 춥다고 여겨지는 홋카이도 지역은 춥기 때문에 오히려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깝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하와이의 경우에는 거리,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기에 오히려 마음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물론 양쪽 모두의 의도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속성에 반대되는 의미를 가져와 작품에 담고자 하는 의도를 형상화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욱 좋겠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이별, 그 뒤에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여기 다른 사람이 같이 있는 느낌이야."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2화의 마지막 지점에 놓인다. 자신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아직 깨닫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즈와 사에코가 직감적으로 서로를 알아차리게 되는 장면이다. 심장을 이식받은 이후로 평생 좋아하지 않던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되고, 피아노를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되는 등 옮겨온 심장을 통해 원래 주인이었던 유스케의 존재가 카즈의 육신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이렇게 조각나 있던 요소들이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내세워지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슬픔과 고통, 괴로움과 참담함과 같은 끔찍한 종류의 것들뿐이다. 하지만 결국 그 이별 뒤에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남은 날들을 다시 한번 충실히 살아가는 일이다. 이 작품 <이별 그 뒤에도>의 끝자락에 놓일 극 중 인물들의 모습 또한 그러하리라 믿고 싶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붙들어내던 사에코와 미키의 태도가 이 이야기의 애환을 조금 더 단단하고 묵직하게 만들어주고 있어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별, 그 뒤에도>의 남은 이야기는 오는 11월 14일 넷플릭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8회차가 동시에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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