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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별세

순천남초 졸업 뒤 강제동원... 2018년 '미쓰비시 위자료 소송' 최종 승소

등록|2024.10.06 11:05 수정|2024.10.06 11:05

▲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대법원 소송 선고를 앞두고 김성주 할머니가 취재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18. 11. 29.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 김성주 할머니가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김 할머니는 전남 순천이 고향으로,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 일본에 강제동원됐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권유와 강압에 의해서였다.

할머니는 만 14세의 나이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굶주림 속에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다. 임금도 한 푼 받지 못했다.

강제노동 과정에서 할머니는 철판을 자르는 일을 하다 왼쪽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일본인은 잘린 손가락을 주워 "오끼(크다), 아이고 크다"하며 하늘로 던지면서 놀렸다고 한다.

또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에으로 할머니는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지진에 다친 이후로 발목이 쉽게 접질려 처녀 시절부터 남들처럼 굽이 조금이라도 있는 신발은 아예 신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모욕당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생전 할머니는 "내 평생 가슴 펴고 큰길 한번 다녀 보지 못했다. 뒷질(뒷길)로만, 뒷질로만 살아왔다"고 말했다.

▲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재판. 광주지방법원 재판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당사자 진술에 앞서 법정 사진 촬영을 허가했다. 앞줄 왼쪽 5번째가 김성주 할머니이고, 7번째가 양금덕 할머니다. 역사적인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법정을 메운 시민모임 회원들과 학생들. 2013. 10. 4.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할머니는 뒤늦게 용기를 내 양금덕(93·광주광역시) 할머니 등과 함께 일본에서 소송에 나섰지만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했다. 일본 정부는 2009년 김 할머니 등 일본 소송 원고들에게 뒤늦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명목으로 99엔(약 1000원)을 지급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 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전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의 도움을 받아 2012년 10월 일본 소송 원고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년여 만인 2018년 11월 29일 할머니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그러나 일본 아베 정권은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빌미로 2019년 한국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취하면서 한일 간 외교적 마찰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의 압력과 방해에 의해 미쓰비시 측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자, 김 할머니는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2022년 윤석열 정권 출범 후 대일 외교 기조가 바뀌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구실로 2023년 3월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일본 피고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둬 대법원 승소 확정 원고들에게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

▲ 마이크 쥐고 한일 양국정부 규탄하는 김성주 할머니. 일본정부가 후생연금 99엔을 지급해 피해자들을 모욕했는데도, 이명박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외교부 규탄 시위에 나선 모습. 2010 1. 26.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2023년 3월 7일 김 할머니는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해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그 뒤 김 할머니는 기존 입장을 바꿨고, 결국 지난해 5월 정부에서 대신 지급하는 소위 '판결금'을 수용함과 동시에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압류도 취하했다.

김 할머니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경기도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월 7일 오후 1시다.

한편 언니 김성주 할머니에 이어 1945년 2월 도야마에 위치한 후지코시 공장으로 동원된 동생 김정주 할머니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한 뒤, 후지코시 측의 배상 이행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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