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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개막작 논란 '전,란', 이걸 놓치시면 안 됩니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번외편] <전,란>

등록|2024.10.07 16:04 수정|2024.10.07 16:04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4년 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날, 개막식 몇 시간 전 기자 시사에서 개막작 <전,란>이 극장 스크린에서 공개되었다. 불이 꺼지고 화면에서 처음 떠오른 건 특유의 효과음과 함께 대문자 'N'의 등장이었다. 그렇다. 국내에선 OTT 그 자체로도 상징되는 넷플릭스 배급으로 극장에서 개봉하는 대신 스트리밍 서비스될 예정으로, 영화제가 끝나는 10월 11일 공개된다. 그 때문에 영화의 개막작 선정은 무수한 논란을 일으켰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 상징하는 어떤 함의 때문일 것이다. 논란 덕분에 영화를 향한 관심도 한층 증폭되는 감이 있긴 했다.

2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워낙 걱정 반, 우려 반으로 시끌벅적하던 작품인 만큼,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수군수군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에서도 그랬다. 상영 직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도 영화가 다룬 주제나 의도보다는 대다수 질문은 개막작 선정과정에 관한 당위 여부로 기울었다. 물론 충분히 검증해야 할 지점이 맞다. 하지만 영화는 일단 영화로 평가하고 승부를 봐야 할 일 아닌가 생각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전,란>은 호불호를 떠나서 흥미로운 구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후를 무대로 삼아 이중삼중 겹치는 숙명의 사투

"전,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천영'은 조선 최고 명문 무신 집안의 노비다. 한 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다. 그는 이 명가의 후계자가 될 외아들 '종려'의 몸종으로 주인이 잘못하면 대신 벌을 받는 신세다. 그만큼 둘은 어릴 적부터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며 지낸 사이다. 자연히 내밀한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공식적인 관계와 별개로 그들은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둘도 없는 동무 사이가 되었다. 주인과의 교우 관계도 관계이지만, 원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의 마음속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노비 신분을 면할 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천영은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꿈을 이루고자 한다. '동무' 종려 역시 벗의 꿈을 돕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태는 치닫고 만다. 기회를 틈타 종려의 집안 노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외지에 나갔던 종려를 제외한 일가 전체가 몰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천영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지만, 종려는 그가 주모자라 여기며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터졌다. 종려는 서울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선조의 호위무사로, 천영은 의병에 가담해 7년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다시 만난다. 천영을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냉혹해진 종려,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꿈에 바라던 면천만 고대하는 천영은 오해로 무장한 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 둘의 악연은 그들만의 결착으로 마칠 수 없다.

마침내 전란이 표면적으로 마무리된다. 쳐들어온 적을 몰아내고 국토를 지켰으니 승리한 전쟁이긴 한데, 온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었고 백성들은 시체를 뜯어먹을 지경으로 도탄에 빠졌다. '참승'이라 해야 마땅한 표현일 테다. 그런 가운데 군주는 오직 왕조의 영속과 통치권 확립에만 관심을 쏟고, 백성의 처지를 헤아릴 겨를도 의지도 없다. 게다가 전쟁에서 이겼으니 공을 세운 자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가 이순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의병장 일부를 역모로 몰아 토사구팽했는지 아는 이들에겐 이제 숙청의 칼부림이 오히려 소름 돋는 순간이다. 천영과 의병들은 포상을 기대하며 서울로 입성하지만, 이제 선조의 근신이 된 종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액션의 쾌감을 넘어 다른 듯 닮아가는 자들의 칼부림

"전,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판타지 소설과 영화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릴 작품은 J.R.R. 톨킨의 원작을 피터 잭슨 감독이 영화화한 <반지의 제왕> 3부작일 것이다. 이 장대한 연작은 독특하게도 두 개의 상반되는 여정을 중심축으로 병렬한다. 하나는 선과 악으로 명백히 나뉜 대립 구도다. 어둠의 제왕 사우론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자유 종족을 노예로 삼으려는 악의 군단 VS 서로 묵은 원한과 입장의 차이를 넘어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과 요정, 난쟁이들의 동맹이다. 여기에서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별로 없다. 오직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숙명적 대결이다.

다른 하나는 선악의 모호함이 돋보이는 구도다. 바로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프로도와 샘, 골룸의 여정이다. 반지가 탄생한 화산의 불로만 이를 파괴할 수 있기에 이 연약한 존재들은 사우론의 본거지 모르도르로 잠입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1만의 군대'를 호위로 데려가도 진입할 수 없는 장소로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길잡이 골룸을 데리고 향하는 여정 가운데 프로도는 골룸의 처지를 동정하고 여러 번 목숨을 살려준다. 그런 연민과 자비가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야기를 이끈다. <전,란>이라는 웅대한 역사 팩션물은 마치 <반지의 제왕>처럼 복합적인 구도와 배경으로 뻔한 무협 액션을 넘어서고자 도전한다.

<전,란>은 제목답게 3인의 검무가 세상을 뒤덮은 안개 속에서 장엄하게 펼쳐진다. 7년 간 벌어진 전쟁 끝, 남겨진 자들의 마지막 전투다. 하지만 셋의 목적은 각기 다르다. 2명은 각각의 허무, 1명은 살아남기 위한 의지로 검을 휘두른다. 그들 운명의 결말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다. 대개 막판에 이르러 모든 배경을 덜어내고, 운명의 양자 대결로 모든 걸 집중하는 게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식에서 탈피해 수정주의 서부극의 거장 셀지오 레오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수많은 리메이크를 낳았던 <석양의 무법자> 속 '좋은 놈' VS '나쁜 놈' VS '이상한 놈'의 구도를 비틀어낸 변주가 순간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누군가는 그저 자신이 원래 태어난 존재로 돌아가고 싶다. 그의 치열함은 그래서 얼핏 보이는 바와 다르게 온건하다. 그저 원래 주어졌다 빼앗긴 질서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그가 속한 시스템 자체의 결함을 깨닫고, 필연인 양 근본적인 변화로 나아간다. 자기 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분노는 재료이되 궁극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그의 기구한 삶은 역설적으로 주어진 신분질서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제약을 초월할 수 있게 만든다. 노비의 자유로운 검법이 허공에 빛난다.

정권 유지 VS 대안사회, 왕도실현 VS 생존본능

"전,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영화는 강동원과 박정민의 대결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남는 건 주요 캐릭터가 현세에 강림한 지옥도 같던 시대에 대한 세계관을 자각하고 자신이 속한 그룹의 입장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특히 '선조' 역을 맡은 차승원의 연기는 배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뱀이 또아리를 틀고 권력을 움켜쥔 것처럼' 고약한 암군과 왕조의 위엄을 동시에 지닌 균형감으로 구현된다. 선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표현력이다.

기존질서의 복고와 왕정 수호의 고담준론이 오가는 대척점에는 체제의 존속 여부와 무관한 백성들의 삶 자체가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오늘의 삶이 전부인 몸부림은 그 때문에 반체제로 낙인 찍힌다. 밥이 하늘이고 가족의 행복을 넘을 게 없을 진데 공허한 대의명분이 무슨 흥미가 될까. 공맹의 도리 대신 충동적이고 직관적으로, 보이는 그대로 판단하는 시야가 결국 빛나거나 살아남는다. 이 영화에서 폐허가 된 경복궁 VS 잡초 같은 백성들의 난장이 어떻게 대비되는지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시대 고증에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선조와 광해군 이대에 이어 집착하던 경복궁 재건, 왜란 전후 기존 체제에 의문을 표하거나 반기를 들었던 숱한 역도들의 그림자, 그들이 주장하던 대동사상, 군주와 백성의 도리란 무엇인가가 차례로 등장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종종 접하던 생생한 당대 역사 서술 비화가 깨알같이 고증되는 대목에서 근래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지 못한 안일한 몇몇 사례들과 비교 불허의 쾌감을 선사해준다.

군사 애호가라면 기쁨의 비명을 지를 지점도 여럿 엿보인다. 주요 캐릭터들이 선보이는 무술 액션 장면에서 그들 각자가 사용하는 병장기는 그저 눈요기가 아닌, 개별 캐릭터의 성격과 그들이 상징하는 집단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이 펼치는 검무의 행간에서 지금껏 볼 수 없던 놀랍고 정교한 무예와 병기의 고차원 재현을 놓치면 땅을 치며 후회할 손해다.

평범한 이들은 저게 왜 굳이 장식처럼 붙어 있는지 이유를 알기 힘들던 '코등이'의 사용법이 제대로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점이 놀랍다. 무과 장원급제자에게 수여된 어사검 VS 농민의 손때묻은 농기구 도리깨의 대조는 그 사용자의 신분과 계급을 형상화한다. 무척 상징적이다. 근세 초입 유럽의 농민봉기에서 주요 병장으로 활용되던 도리깨 용법과 비교해도 흥미로울 요소다. 쌍검을 구사하는 이도류 역시 캐릭터의 무국적성을 구현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결론 없는 논란보다 21세기 영화문화의 미래 상상하기

올바른 유자라면 왕도와 민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던 시절, 왕이 왕도를 버리면 유자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영화는 질문한다. 아마 영화가 스트리밍 서비스되기 시작하면 한국 사회를 뒤덮은 진영논리와 역사전쟁 탓, 본 작품의 주제의식은 한동안 도마 위에 오를 법하다. 그 정도로 역사해석 관련 직설적인 주장이 녹아들어 있다.

영화가 스트리밍 서비스 이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란 이유로 받는 논란은 충분히 검토되고 각자의 입장을 나눠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 영화가 최적화된 관람환경은 과연 어디일까 물음이 될 테다. 영화의 전당 400석 중극장에서 최상의 극장 환경으로 본 <전,란>과 노트북 스크린으로 보는 <전,란> 중 무엇을 택해야 할까? 질/양이 모두 늘어나는 OTT 오리지널 영화와 극장의 상생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작품은 숱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작품정보>

전, 란
Uprising
2024 한국 역사/액션 127분
감독 김상만
출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PD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세미콜론 스튜디오
SEMICOLON STUDIO
배급 넷플릭스

2024 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2024.10.11. 스트리밍 서비스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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