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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일로일로 세종학당으로 와 보라카이"

필리핀에서 영어를? 이제는 한국어를 배웁니다

등록|2024.10.07 13:34 수정|2024.10.08 09:14

필리핀 일로일로한국에도 유명한 관광지 보라카이가 속한 파나이섬의 행정 수도이다 ⓒ 박리란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외국인에게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냐고 물어보면 아마 '세종학당'을 꼽을 것이다. 세종학당은 매년 엄격한 심사를 통해 해외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지정해 지원해 왔다. 지난 6월, 올해 선정된 18개소의 해외 신규 세종학당 명단에서 반가운 지명을 발견했다.

필리핀 일로일로. 마닐라나 세부에 비해 한국에는 덜 알려졌지만 필리핀에서 6번째로 큰 파나이섬의 행정 수도이다. 일로일로라는 지명이 낯선 이들도 '보라카이'에는 반색할 것이다. 필리핀 최고의 관광지 중 한 곳인 보라카이도 파나이 섬에 속해 있다. 그래서 필리핀 동포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일로일로 와 보라카이" 하고 재미있게 말하곤 한단다.

오랜 기간 일로일로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 알리기에 힘써온 지인에게 축하를 전할 겸 연락을 드려 보았다. 대학 강사라기보다 그저 선생님으로 불러달라는, 일로일로 소재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학교의 박리란씨이다.

해외신규 세종학당으로 지정받은 일로일로 세종학당2024년 신규 지정 세종학당 지정서 전달식에는 일로일로 웨스트비사야스 어학당 전 디렉터인 마리아 아순선 크리스틴 데킬리아 부총장이 참석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 세종학당교육문화팀


일로일로 와 보라카이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겨울 연가'(2003년)는 일본뿐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듬해 산다라박(2NE1 멤버)이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서클 퀘스트>에서 준우승을 하자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크게 일었다. 짧은 한국말이 필리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리란 선생은 그즈음 공항 면세점에서 반말로 말을 거는 직원을 보게 되었단다.

"언니, 이 크림 써봐, 좋아!"

필리핀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살고 있던 그는 '만약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다면 좀 더 교양 있는 표현을 가르쳐 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기회는 운명처럼 급히 다가왔다. 한국에 취업을 나가야 하는 이들을 도울 일이 생긴 것이다. 당장 치러야 할 EPS-TOPIK(한국어 능력 검증) 시험만 도와주면 될 줄 알았는데 어느새 2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한글과 함께, 학생들과 함께 말이다.

일로일로 소재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학교에는 원래 한국어 전공 과정이 없었다. 박리란 선생도 처음에는 학내 외국어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교육 개혁으로 학제가 재편되면서, 오랜 준비와 노력 끝에 2018년 필리핀 최초의 외국어 학과 한국어 전공 과정이 개설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듯한데, 세종학당은 어떻게 지원하게 되었을까?

"작년에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몇 년 만에 수도 마닐라에서 열렸어요. 코로나 이전만 해도 지역 한인회 주최로 지역 예선에서 우승하면, 상금과 비행기표를 지원받아 본선에 참여했거든요. 그런데 작년에는 세종학당이 주최하게 되면서 학당 출신이 아닌 경우 참가가 제한되더라고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한국어 전공생인 만큼 우승 가능성이 높은데도 실력을 선보일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 가슴이 아팠어요. 그것도 필리핀 최초 한국어 전공 과정 학생이 말이에요."

배경민 교수와 세종학당주최 한국어 말하기 대회 입상자들필리핀 세종학당 주최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일로일로 소재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 학생 4명이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상을 수상한 아리자 이노센시오는 한국어 전공 1회 졸업생이 되어 현재 모교와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심사위원이었던 필리핀국립대(UP) 배경민 교수와 입상자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배교수는 UP 한국학 연구소 소장이자 언어학과 교수로 제직 중으로 필리핀 내 한인 네트워크 형성과 매년 학술대회를 주관하는 등 필리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배경민

축하 현수막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수상한 네 학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 박리란


벽을 만났지만 돌아가거나 낙담하기보다 돌파하기로 했다. 이메일로, 전화로 주최 측을 설득하고 한인회를 통해 건의를 올렸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했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참가 허락을 얻어내었을 뿐 아니라 우승까지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고, 이를 지켜보던 박리란 선생은 울컥 눈물샘이 터졌다. 처음 두 취업생을 돕던 2005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걸음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고되지만 보람찬 기억을 발판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자 다짐했다. 제자들을 위해서다.

"행사 참여의 기회는 물론이고 앞으로 학생들의 진로를 위해서도, 여러 한국 기관과 연결점이 필요해 보여서 세종학당 신청을 하게 되었지요. 제 바람은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의 한국어 과정과 세종학당의 과정을 통해 좀 더 전문적인 '현지인 한국어 교사'가 양성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한국인 교사가 돕고 있지만, 필리핀 교사가 주도하는 한국어 센터가 운영되길 바라요.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얼른 석박사 학위를 마치라고 종용하고 있지요. "

마닐라도 아닌, 지방에 있는 일로일로 세종학당의 인기는 어떨까?

"시범 운영 기간이라 3개 반 15명, 1개 반 10명, 모두 55명 모집 예정이었는데요, 등록을 받기 시작하자마자 150명이 몰려와 하루 만에 모집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어요. 지난 달에 추석 행사도 성황리에 잘 치렀습니다. 윷놀이 대회와 비빔밥 콘테스트, 공기놀이, 제기차기, 투호도 체험하고요 꼭 동네 잔치 같았지요."

일로일로 세종학당 첫 추석 행사비빔밥 콘테스트, 투호, 제기차기, 윷놀이 등 유쾌하고 알찬 행사를 진행한 일로일로 세종학당의 추석 행사. 박리란 선생의 자녀도 보인다. 남편과 장성한 자녀들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특히 필리핀에서 자라 영어, 현지어, 한국어가 가능한 자녀들은 엄마의 좋은 도우미이다. ⓒ 박리란제공


'영혼을 갈아 넣었다'라는 농담 섞인 말이 있다. 좋은 결과물을 위해 전심전력했다는 뜻일 테다. 박리란 선생의 노고가 꼭 그렇다. 꼼꼼한 커리큘럼과 과제, 평가표, 학습 자료에 행사를 치르는 상품, 음식 준비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다재다능한 그는 한국어 교육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2007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학내 언어 축제 준비만 해도 그렇다. 중국의 동양화나 일본의 오리가미(종이접기)와 차별을 두기 위해 고민 끝에 '한복 종이접기'를 시작했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복을 공수받았다. 지금까지 100여 벌 가량 모은 한복의 세탁은 물론 동정을 달고 댕기도 만든다. 그래도 KPOP 공연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단함보다 흐뭇함이 채워지곤 한단다.

지난 8월 24일 세종학당 첫 입학식에서 함께 부른 <일로일로 세종학당가>도 그녀의 작품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지만 나누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많이 배운 만큼 사랑할래요'라는 가사를 일부러 넣었다고 한다.

한복을 입은 필리핀 학생들일로일로소재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에서는 매년 랭귀지 페스티벌이 열린다. 한국어 과정 학생들을 위해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한복을 공수받거나 싸게 구입을 하고, 수선과 세탁도 하고, 댕기도 만든다. 행사 음식부터 전통 놀이 준비, 교과 과정에 필요한 자료까지 일로일로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심기 위해 박리란 선생을 부단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세종학당가도 그녀의 작품이다. ⓒ 박리란


열매를 맺고 있는 필리핀 사랑

필리핀은 크고 작은 자연재해가 잦은 나라이다. 박리란 선생이 필리핀과 가진 첫 인연도 무려 65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피나투보 화산 폭발(1991년) 구호 활동이었다. 한국어 교원 일정도 빠듯하지만, 재해가 덮친 지역을 살피고 일상에서 이웃을 돌아보는 일도 그에게는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떤 일에도 물심양면 도와주는 한국의 지인들과 해외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각별히 도움을 주신 동의대, 부산대, 배화여대 교수님과 관계자분들, 필리핀대학 한국학연구소, 행사 때마다 한복에 어울리는 올림머리를 무료로 해주시곤 했던 미용사분과 한인회 등 각계각층에서 받은 도움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한다.

함께 하는 한정자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은퇴 목회자 사모인 그는 학교 강사료가 생활비도 커버하지 못하는데도, 힘이 있을 때 7년간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60대의 나이에도 어린 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늘 고운 인상을 풍기는 그를 학생들은 'K 뷰티'라 부르며 잘 따른다고. 학교와 세종학당, 현지 이웃 돌봄도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의 애정과 섬김이 모여 이뤄져 왔다.

필리핀에서 자란 박리란 선생의 세 자녀도 좋은 도우미이다. 얼마 전부터 엄마는 필리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딸들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재미있는 상황 속에 있다. 두 돌이 채 되지 않아 필리핀으로 건너온 탓에 한국어가 서툰 아들이 입대할 때는 걱정도 많았다. 다행히 영주권 프로그램 덕에 논산에서의 5주 훈련을 영어권에서 온 청년들과 함께 받으며 군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입대할 때 최하 등급으로 시작했는데 차츰 각 영역에서 특급을 따기 시작하더니, 특급 전사로 제대했다고.

"일로일로 세종학당에도 입대 문제로 한국어를 배우러 온 코피노 가정 학생들이 있어요. 한국 문화가 좋아서, 한국에 취업하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도 있고요. 다양한 필요가 있어서 찾아온 다양한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요."

이런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지난 졸업 파티에서는 졸업생들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코로나라는 힘든 시기를 이기지 못하고 학업을 포기하려 했는데,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졸업까지 오게 되어 감사하고 벅차다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코로나 펜데믹 시기 학생들을 방문중인 두 교사강력한 봉쇄령이 내려지고 원격 수업이 진행되었던 시기, 학생들의 형편을 살피고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두 한국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방문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산골과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두 교사는 5일 동안 파나이 섬 구석구석을 다녔다고 한다. ⓒ 박리란


"필리핀도 강력한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졌었어요. 집 앞 슈퍼에 가려고 해도 한 가구당 한 사람의 외출증을 바랑가이(동사무소)에서 발급받아야 할 정도였죠. 원격 학습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편차가 워낙 컸어요. 고심 끝에 교재와 구호 물품, 위로가 될 만한 선물을 챙겨 가정 방문을 하기로 했죠. 통행증을 받아 가면서요.

운전 중에 폭우로 앞이 보이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구글 맵만 믿고 산골까지 다녔는데 길이 없어 헤매기도 하고, 부친상을 당한 학생을 만나 문상객이 되기도 했어요. 5일간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파나이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학생들을 직접 만나 형편을 살필 수 있었지요. 원격 강의에 참여하기 힘든 상황을 보고 그렇다면… 온갖 자습 자료를 만들어 한아름 안겨줬습니다! (웃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큄포라는 은퇴 교수 이야기를 꺼냈다. 외국어 센터장이었던 큄포 교수는 필리핀 교육 개혁 당시 '외국어 교육이 강조되지만 현장에서 뛸 선생님이 없다'는 점을 들어 외국어학과 개설을 추진했다고 한다. 원래는 한중일 3개 전공 과정을 세우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6년간의 산고 끝에 필리핀 최초의 한국어 전공 과정만 세울 수 있었다.

큄포 교수는 외국인 교수들의 처우 개선책까지 마련해 주고 은퇴를 했다. 박리란 선생도 큄포 교수의 뜻을 이어받아 은퇴 전 10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단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 우승자 아리자 이노센시오는 졸업 후 현재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제자가 동료 교육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 전공과정 개설에 헌신한 큄포 은퇴교수큄포 교수는 일로일로 소재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에 한국어 전공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무려 6년이나 애썼고, 외국인 교사들의 처우 개선책까지 마련한 후 은퇴를 하셨다. 박리란선생은 외국인 강사들의 울타리이자, 교육가로 큄포 교수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자신을 환대해준 일로일로가 제 2의 고향과 같다며 큄포 교수는 일로일로를 사랑하고 제자 양성에 헌신했다. 박리란 선생도 큄포 교수를 모범삼아 따뜻하고 성실한 이웃이자 스승이 되길 소망한다고. 큄포 교수의 은퇴식에서 한정자 선생, 큄포 교수, 박리란 선생이 함께 했다. ⓒ 박리란


"세종학당에서도 한국어 5급 과정은 올해 나왔습니다. 학당 특성상 다수의 세종학당은 초급 학생이 많고 고급반까지의 운영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로일로 세종학당은 전공생이 다수라 중급과정(4급) 이상의 학습자가 많고 그 중 우수 학습자를 선별해 고급과정으로 진학시킬 예정입니다. 일로일로 세종학당만의 강점이지요. 실력으로는 우리 학생들이 수준급이라고 자부합니다."

외국어 부문에서 수준 높은 커리큘럼과 학생을 보유한 필리핀 국립 대학(UP)을 따라잡고 장학금과 외국 기업에 대한 취업 기회를 일로일로에서 준비된 제자들에게도 열어주고 싶단다. 교양 있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싶어 했던 20년 전의 소망이 실력 있는 현지인 한국어 강사 배출이라는 열매로 맺히기 시작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하게 자신의 뜻을 날마다 쓰고 펼쳐보라'고 한글을 창제하셨다. '세계의 사람'들이 쉽게 익혀 널리 쓰게 될 줄 예측 하셨을까? 영어를 배우러 필리핀에 간다고? 이제 필리핀에서는 한국어를 배운다. 나를 위해서뿐 아니라 더 배운 만큼 사랑하기 위해서도.

일로일로 세종학당 입학식총 55명 등록을 받기로 했는데 첫 날부터 150명이 몰려드는 즐거운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 박리란

세종학당 입학식에서 한정자, 박리란 선생아직은 한국인 교사가 돕고 있지만, 웨스트비사야스 주립대에서나 일로일로 세종학당에서 필리핀 교사가 얼른 세워져 운영되길 바란다고 한다. 주립대에서 언어 집중과정까지 통과한 중급 실력 이상의 제자들이 세종학당에서 고급과정을 이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초급보다 중급 이상 실력자 배출이 가능한 점이 일로일로 세종학당의 최대 강점이다. ⓒ 박리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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