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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생긴 '윤상원'로, 직접 가봤습니다

1980년 5월 시민군 대변인 지낸 윤상원 열사 기리는 도로명 만들어져

등록|2024.10.08 10:15 수정|2024.10.08 10:18

▲ 윤상원 열사 조형물. 열사의 태 자리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윤상원민주로'와 '윤상원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 이돈삼


'윤상원민주로'와 '윤상원길'이 있다. 1980년 5월 시민군(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지낸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길이다. 5·18 민주유공자 이름을 딴 전국 첫 번째 명예도로명이다. '명예도로명'은 지역사회 헌신도, 공익성 등을 고려해 사람이나 기업의 이름을 따 부여한다.

'윤상원민주로'는 지난 7월, 윤상원 열사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로 가는 임곡로의 일부 구간에 이름 붙여졌다.

진곡 교차로에서 임곡동 행정복지센터까지 5.7㎞에 이른다. '윤상원길'은 열사의 태 자리가 있는 마을길 329m를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5·18의 상징이 된 윤상원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주민과 유관단체 의견 수렴을 거쳐 부여했다. 지난 5일 이 곳들을 찾았다.

직접 가 본 윤상원민주로

▲ 광주 금남로 금남공원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518m 구간은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이름 붙여져 있다.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 전일빌딩245,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이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 '유네스코 민주인권로'에 자리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1층에는 오월길 방문자센터가 들어서 있다. ⓒ 이돈삼


명예도로명은 또 있다. 광주 금남로 금남공원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518m 구간은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지정돼 있다. 서방사거리에서 4·19민주혁명역사관 앞을 거쳐 광주중앙초등학교에 이르는 구간은 '4·19로'로 이름 붙여졌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 '송현로'는 대구 달서구 송현동의 이름을 따 붙였다. 대구 달서구엔 광주 중흥동의 이름을 딴 '중흥로'가 있다. 동서 화합의 상징이다.

이뿐 아니다. 빛고을 광주엔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이나 시호를 딴 도로명이 많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선 저항의 거리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를 딴 도로 이름이다. 정충신은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금남군에 봉해졌다. 충장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시호를 따 붙였다. 김덕령은 비운의 의병장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되살아났다.

제봉로는 고경명, 구성로는 전상의, 경열로는 정지, 죽봉로는 김태원, 필문로는 이선제, 서암로는 양진여, 눌재로는 박상, 사암로는 박순의 호를 땄다. 의재로는 허백련, 송강로는 정철, 하서로는 김인후의 호에서 따 왔다.

▲ 윤상원 열사 흉상. 열사의 모교인 전남대학교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면 우리는 어차피 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강경 진압이 오늘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윤상원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1980년 5월 26일 브래들리 마틴, 테리 앤더슨 등 내외신 기자 10여 명 앞에서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오후 7시, 대학생 시민군에게 총기를 지급한 윤상원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과 여학생의 귀가를 강하게 권했다.

"학생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부디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들려줘야 합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방송실에서 박영순의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4시, 3공수여단 소속 공수부대원이 도청 후문을 통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후문이 뚫렸다는 함성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윤상원은 복부 총상으로 사망했다. 도청 회의실 2층 강당 무대 뒤에서다. 시민군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 천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윤상원민주로'와 '윤상원길' 표지판. 윤상원민주로가 윤상원 생가가 있는 천동마을 앞을 지난다. ⓒ 이돈삼


▲ 윤상원 열사 생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윤상원 열사는 1950년 8월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3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곡초교, 광주북중, 살레시오고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마치고 입대, 하사로 복무했다.

1975년 복학한 윤상원은 외무고시를 준비한다. 김상윤(전남대 68학번)을 만난 건 그즈음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난 김상윤으로부터 의식화 학습을 받았다. 윤상원은 4학년 때 4·19기념 시위를 계획하는 등 활동가의 길을 걷는다.

대학 졸업을 앞둔 78년 1월 윤상원은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한다. 그해 6월 일어난 전남대 교수들의 교육지표사건과 학생 시위 얘기를 듣고, 6개월 만에 사직했다. 광주로 돌아온 윤상원은 광천공단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취업, 노동자 생활을 한다.

78년 5월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박기순이 이끈 들불야학이 시작됐다. 청소년 노동자 35명과 강학 8명으로 출발했다.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이었다. 윤상원은 한남플라스틱 근무와 들불야학 예비교사 활동을 위해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의 거처는 야학 강학과 형제들 모임 장소가 됐다.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500명 이상 총상

▲ 80년 당시 들불야학이 자리했던 광주광천동성당. 왼쪽 앞에 옛 들불야학 건물의 외벽과 5·18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 총에 쓰러졌다. 유신체제의 종말이었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에 합의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대학가는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다. 5월 16일 광주에선 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열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점거했다. 김대중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잡아들였다. 윤상원의 정신적 스승인 김상윤도 녹두서점에서 예비검속됐다.

김상윤이 계림동에 연 녹두서점은 사회과학 서적을 유통하며 청년들 모임과 배움터 역할을 했다. 18일 아침부터 예비검속자 가족이 모여들고, 5월항쟁의 구심점이 됐다. 윤상원, 박효선, 김상집 등이 모여 화염병을 만들고 투사회보를 작성했다. 녹두서점은 유인물과 현수막 등 시위 물품 보급소였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참상을 지켜본 윤상원은 시민에게 상황을 알릴 소식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투사회보는 박용준이 필경하고 서대석, 이영주 등 들불야학 강학과 형제들이 제작·배포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가 참여한 차량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를 폭도로 매도한 방송국이 불태워졌다.

▲ 80년 5월 20일 저녁 차량 시위를 떠올려 주는 광주시내 거리 의자. 버스정류장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 이돈삼


21일 도청 앞 금남로에 시민 10만여 명이 모였다. 항쟁 이후 최대 인파였다. 어디선가 애국가가 울려 퍼지더니,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고, 윤상원은 시민군과 함께 도청을 점거하며 '해방광주'를 맞이했다. 22일 윤상원은 가두방송을 하고 투사회보를 배포했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극단 광대, YWCA 송백회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시민궐기대회를 계획했다.

23일 학생과 재야 수습대책위원회 주도로 무기 회수가 시작됐다. 윤상원은 정상용, 이양현 등과 함께 수습대책위원회 교체에 합의했다. 오후 3시 도청 앞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입장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가 발표됐다.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선 전두환 화형식이 열렸다. 윤상원과 투사회보 제작팀은 광주YWCA에서 항쟁파 지도부를 결성했다. 정상용이 위원장, 윤상원과 김영철·윤강옥은 기획을 맡기로 했다.

▲ 5·18항쟁의 중심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분수대 광장. 지금은 옛 도청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25일 광주YWCA에 재야인사들이 모여 총기 회수 문제를 논의했다. 이성학·장두석·박석무는 회수 반대, 조비오·조아라 등은 비폭력을 주장했다. 윤상원은 대학생 시민군을 조직하고 총기 회수를 주장한 김창길 학생수습위원장을 몰아냈다. 항쟁파 중심 학생수습위원회가 탄생했다. 위원장 김종배, 내무부위원장 허규정, 외무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홍보부장 박효선이 맡았다.

26일 새벽 계엄군 이동 소식이 전해졌다. 오전 8시 이성학·홍남순·이기홍·김성용·조비오 등 수습위원 17명이 계엄군의 시내 진입에 맞서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계엄사와의 협상은 '빈 손'이었다. 자정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제5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끝난 직후, 다시 김창길이 나타나 무기 반납을 주장했다. 윤상원은 20여 분 동안 반대 주장을 폈다. 박남선이 천장에 권총을 쏘며 "어떤 놈이 우리를 계엄사에 팔아넘기려 하느냐"고 외쳤다. 학생수습위원회는 정상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 1982년 영혼결혼식을 올린 윤상원·박기순의 묘.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 윤상원기념관에서 만난 작가 하성흡의 수묵으로 그린 윤상원 열사 일대기 '부활-역사 속에 살아오다'. 한지에 수묵 담채 , 2021 ⓒ 이돈삼


5월 항쟁이 끝나고 82년 2월 20일,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들불야학에서 '아픈 시대'를 함께 고민한 신랑 윤상원, 신부 박기순이었다. 윤상원은 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서, 박기순은 78년 12월 26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가족과 친지들이 광주 망월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붙이고,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이자 작곡가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시대의 노래로 역사에 남겨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80년 5월을 가장 넓고 깊게 기억하는 방식이 됐다. 각종 시위나 추모제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아니 세계인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부르는 노래가 됐다.

윤상원 열사는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혀 있다. 생가와 기념관은 광주 천동마을에 있다. 기념관에 윤상원 동상이 서 있다. 왼손에 책을, 오른손엔 총을 들고 당당히 선 모습이다. 5개와 18개의 기둥으로 5월과 18일을, 그리고 백색의 전남도청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있다. '윤상원민주로'를 타고 '윤상원길'을 따라가서 만난다.

▲ 윤상원기념관 전경.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 들어서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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