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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 대통령... 오죽하면 야당서 '히틀러' 언급까지

[이승만 시대별곡] '일민주의'와 이승만의 군주제 야망

등록|2024.10.15 11:45 수정|2024.10.15 11:45

▲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 부부. 1951.3.23 ⓒ 연합뉴스


이승만 집권기는 잃어버린 12년이다. 1948년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했지만, 그 뒤 12년간 한국은 민주공화국 체제를 향해 정주행하지 못하고, 구시대 유물이 된 과거의 정치체제를 찾아 역주행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은 민주공화정이 아닌 실질적 군주정의 길을 찾아 헤맸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이 추구한 이념이 일민주의(一民主義)다. 이범석 총리와 안호상 문교부 장관이 각각 회장·부회장으로 참여한 일민주의보급회가 작성한 '일민주의 체계표'에서도 이 이념이 개략적으로 드러난다.

체계표에 따르면, 일민주의는 한민족 전체가 동일한 경제적 복리와 정치적 권리를 누리고 지역 차별과 성차별을 받지 않은 상태를 지향한다. 총리와 장관이 참여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이것이 초창기의 이승만 정부가 공식 추진한 국가 이념이다.

1997년에 <진단학보> 제83호에 수록된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논문 '이승만 정부 초기의 일민주의'는 이 이념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과 청년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면서 "이승만정권 초기에 일민주의는 국시·당시·단시 등으로 중요하게 떠받들어졌다"라고 설명한다.

소비에트 방식과 결합한 이승만의 '일민주의'

정부수립 당시의 5대 일간지인 1950년 1월 18일 자 <한성일보> 2면 좌상단에 따르면, 안호상 장관은 그달 17일 기자회견에서 "민족의 근본 교육방침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일민주의에 입각해서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앞으로 새로 교과서를 제정할 때에는 일민주의에 대한 교재를 많이 삽입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정도의 위상을 차지한 일민주의 역시 이승만의 군주제 야망과 닿아 있었다.

전 국민을 하나의 계층, 하나의 계급으로 균일화시킨다는 일민주의는 한국과 중국의 군주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했던 제민(齊民) 이념과 통하는 데가 있었다. 한·중 군주들은 천하의 통치권과 소유권을 군주 일인에게 귀속시킨 상태에서 모든 백성을 군주의 지배하에 포섭하는 제민 상태를 이상적인 체제로 생각했다. 제민 상태 하에서는 군주 이외의 특정 귀족이나 특정 세력이 과도한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영·정조로 대표되는 탕평 이념도 제민과 통하는 데가 있었다.

제민 이념은 귀족을 견제하는 기능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에게 유리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고도의 권위주의와도 연결됐다. 제민은 분권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족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소지가 컸다. 군주의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귀족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처럼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는 제민 이념과 통하는 데가 있는 일민주의를 이승만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추구했다. 이승만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민간인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승만이 선한 의도로 일민주의를 추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의 유별한 권력욕과 더불어, 왕위계승에서 배제된 양녕대군의 16대손인 그가 왕족 의식을 특별히 강하게 표출한 점 등을 감안하면, 그의 일민주의는 장기집권과 독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활용됐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군주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민주의와 잠시 결합했던 것이 있다. 이승만이 적대하는 북한·소련·중국에서 통용되는 소비에트 방식이 일민주의와 혼재되는 양상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나타났다.

당이 국가를 이끄는 체제가 북·소·중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과 자유중국(대만)에서도 출현한 현상을 다루는 후지이 다케시 성균관대 연구교수의 논문 '당국(黨國)체제의 연쇄 – 동아시아 내전과 냉전'(2014년 <동북아역사논총> 제43호)은 1951년 12월에 창당된 자유당의 당헌에 공산당 시스템이 반영된 사실에 주목한다.

논문은 "당헌 가운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제3조와 제46조에서 '본당(本黨)의 토대로'로서 9인조 세포를 두었으며, 제7조에서 '당원은 본당 말단조직인 세포체에 가맹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사실"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세포의 임무는 '당원의 친목과 정치훈련 기타 의사의 상달과 상부조직의 지령 전달. 근린의 정보수집 및 제반 정보의 상부 조직에 대한 보고 등'으로 제시되었으며 '전항(前項) 수행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매주일 1회 이상 반드시 세포회의를 열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위 논문은 "당의 말단 조직으로 세포를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산당의 조직 방식"이라고 평한 뒤, 이승만 정권이 전체 국민들을 균일화하는 일민주의를 표방한 데 이어 신당인 자유당의 조직 방식으로 소비에트 시스템을 채택한 것을 두고 "히틀러의 독일국민사회주의노동당과 같지 않느냐"라는 비판이 민주국민당 쪽에서 나왔다고 소개한다.

자유당은 중앙정치훈련원이라는 기구도 뒀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정당연수원이 낯설지 않지만, 교육을 통해 당원들의 의식을 개조하고 균일화를 꾀하는 것은 이 시기에는 공산당 방식으로 이해됐다.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표출된 소비에트적 방식은 같은 시기의 대만 중국국민당의 개조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북·중·소의 정치 시스템이 한국·대만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나타난 배경을 두고 위 논문은 "적에게 배워라"라는 소제목을 통해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세력의 파워가 지금보다 강력했던 시절에 한국·대만이 그들과 적대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방식을 일정 정도 차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일민주의와 공산당 지배는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한 국가 내에서 다양한 계급이 공존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전 국민을 하나의 계층과 하나의 계급으로 균일화하고자 하는 점이 그렇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을 균일화시키고자 했던 이승만의 독재적 야망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승만이 한국의 스탈린이 되고자 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과거로 역주행한 이승만 정권

▲ 1956년 실시된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 선거홍보물이 동대문에 붙어 있다. ⓒ 연합뉴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을 설명하면서 "그는 자기의 지지 세력인 국민회 소속 의원을 많이 배출한 지역(충남·경북·강원·경기)과 토착세력(읍면장, 지방관료, 청년단체 등)과 신흥 상공인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하였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치세력은 한민당의 친일 보수세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고, 특히 지방에서 좌익계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지방의 친일 부르주아지들이 그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지역 차별과 계급 차별을 해소하는 일민주의를 표방했던 이승만이 집권 3년 만에 충남·경북·강원·경기권과 신흥 상공인 및 지방 유지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창당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일민주의를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인식했음을 증명한다. 소비에트 방식을 채용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이 강력한 권력을 갖는 것을 보고, 또 우방인 자유중국이 그런 방식을 일부 차용하는 것을 보고 그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스탈린'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념 여하를 떠나 '스트롱맨'이 되고자 이것저것 차용해봤던 것이다.

그처럼 이승만은 실질적 군주의 길로 나아갔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라면 소비에트 방식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에 없는 일민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구상이 순탄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미국과 국내 자본가들과 야당이 그의 야망을 그냥 좌시할 리 없었다. 국내 보수세력에게 특히 민감한 일민주의는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대거 희석됐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군주제의 길로 나아갔다. 1952년과 1954년에는 두 차례의 불법적·초헌법적 개헌을 강행하고 1960년에는 너무 노골적인 부정선거까지 감행하면서 그 길로 내달렸다.

전 세계가 민주주의를 향해 정주행할 때, 이승만으로 인해 한국은 과거로 역주행했다. 그가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12년이나 과거로 퇴보했다. 되돌아오려면 적어도 12년이 필요하므로 이승만이 까먹은 시간은 최소 24년이다. 제1공화국 12년간은 '잃어버린 12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4년 플러스알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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