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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왜 낳았어요?' 공포물로만 알았던 프랑켄슈타인의 반전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버림받은 피조물의 절규... 부모 자식 이야기로도 읽혔다

등록|2024.10.10 12:53 수정|2024.10.10 12:53

인용문 ⓒ 홍윤정


소설 속 '월턴 선장'은 북극탐험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안고 런던을 떠나 북해로 가는 중이다. 그는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영국에 사는 마거릿 누나에게 안부편지를 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첫 페이지를 읽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소설이었나? 서두부터 감성을 움직이는 편지글이라니.... 얼굴에 덕지덕지 바느질 자국이 붙은 괴물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최근에 책과 멀어지는 게 아쉬워서 나는 젊은 시절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 중이다. 고전으로 분류되는 문학작품을 나이들어 다시 읽으니 예전에 미처 발견못했던 것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속, 러시아에서 배를 장만하고 선원들을 고용한 월턴 선장은 위험이 따르는 항해를 앞두고 많이 불안하다. 해서 편지에 이렇게 쓴다.

'마거릿! 내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친구가 없어요. 신중하면서도 용감하고, 취향도 나와 비슷한 그런 친구가 지금 내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북극 탐험을 계획한 이유는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6년 동안이나 고된 과정을 감수했다. 막상 출항하려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럴 때 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몇 달 뒤 월턴 선장의 배는 안개낀 빙하 사이를 항해하다 빙산조각위에 쓰러져있는 한 남자를 구조했다. 그는 기력이 소진되어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지만 곧 기운을 회복하자 선장에게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는 스위스인 과학자로, 자신이 만들어낸 끔찍한 생명체를 없애기 위해 지구 끝까지 쫓아가는 중이라 했다.

왜 자신이 만든 생명체를 없애려 할까? 프랑켄슈타인은 말한다.

'나는 생명의 원리를 연구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생명체를 만들어냈소. 그런데 그 생명체의 형상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워, 크게 당황하고 말았소. 할 수 없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오.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내 아내를 살해했소.

나는 분노했지. 더 이상 그 녀석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반면, 아무 것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난 피조물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왜 인간들은 나를 혐오하는가.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었더니 사람들은 나에게 돌을 던지고 총을 쏴 상처를 입히더군.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나는 혼자서 언어를 익혀 책도 읽을 줄 알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추운 날씨에도 잘 견딜 수 있어. 하지만 흉측한 모습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혐오하지.

나는 외롭고 슬퍼서 나를 창조한 이를 찾아가 나처럼 흉측하게 생긴 친구 하나를 창조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러나 거절당하고 말았어. 나는 내 창조자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어. 내가 당한 고통을 그도 똑같이 겪어야 해.'

고대 그리스신화속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프랑켄슈타인 역시 생명체를 창조했기에 그를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 부른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벼락에서 불씨를 훔쳐내 인간에게 선사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바꿔놓은 신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체를 창조했을 뿐, 그 피조물의 행복과 안녕을 보살피지 않았으니 둘의 차이점은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에 있달까.

피조물의 외침, 자녀의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괴물의 엽기행각을 다룬 공포소설로만 알다가 나이들어 다시 읽으려니 예전에 미처 발견 못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가령, 부모자식 관계를 상징하는 은유들이 보이게 되니 피조물과 창조자 사이의 원한맺힌 절규가 실감나게 들렸고 창조자보다는 피조물의 입장에 좀더 귀기울이게 되었던 것.

"창조주여, 제가 간청하더이까, 진흙을 빚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하더이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올려 달라고?"

실락원에서 쫓겨나며 아담이 한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식들이 부모 앞에서 원망하며 내지르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왜 나를 낳으셨어요?'

창조자인 부모는 이럴 때 뭐라 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해진다. 가끔은 답답한 마음을 희석해보고자 이런 식으로 답하기도 한다.

'그래, 미안하구나. 아빠가(엄마가) 그때 외로워서 그랬단다.'

프랑켄슈타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피조물을 파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조물 역시 창조자가 죽어버리자 마치 고통이 종식된 것처럼 해방감을 느끼며 그제서야 복수를 단념하고 죽기를 결심했으니,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둘 사이에 용서나 포용이 들어서지 못한 채 끝나버린 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월턴 선장이나 피조물이 친구를 갈망한 건 극도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인터넷으로 '외로움'을 검색했더니 한 백과에 이렇게 나와있다.

"외로움(loneliness)의 사전적 정의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격리되었을 때 느끼게 된다. (…)"

다시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을 검색했다. 도움이 될만한 동영상과 칼럼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모두 유용해보였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이런 정보들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리라.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은 의외로 가까운 데에 있는 지도 모른다. 나를 알아주는 이의 따듯한 시선, 친절한 말 한 마디, 이런 것에서 말이다.

한편, 월턴 선장의 배가 빙산에 갇혀 위험에 처하자 선원들은 선장에게 즉시 배를 돌릴 것을 요청했다. 숙고 끝에 선원들 요청을 받아들인 월턴선장은 일생일대 목표였던 북극 탐험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마거릿 누나에게 썼다.

편지로 시작해 편지로 끝나는 이 소설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자의 외로움을 극복한 방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빙하 위를 항해하는 배 안에서 꼬박꼬박 항해일지를 쓰듯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매일밤 기록해낸 월턴 선장은 마침내 고독과 싸워 승리한 사람이 되었다.

▲ 프랑켄슈타인 책표지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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