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흔적 쫓는 남성... 이 영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넘버링 무비 396]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파동>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파동>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는 상상력과 환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창작자의 현실로부터 깨어나기도 한다. 직접 경험했던 일이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스크린 속으로 옮겨다 놓는 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시절에 강하게 뿌리내린 감정이나 정서가 삶의 궤적을 따라 축적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지가 되고 형상화하는 것. 그런 순간이 되면 이제 더 이상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살아갈 수는 없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영화의 태동 가운데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에는 두 인물이 맴돌고 있다. 서울에서 철도 기관사로 일하는 문영(박가영 분)과 초등학교 교사인 상우(안병우 분)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같은 공간을 향해 짧은 여정을 떠난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찾기 위해 필요한 행위다.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닮았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는 시간을 따르며 이야기를 쌓아나간다. 동시에 감독은 이들을 연결하고 분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과거와 현실, 기억과 환상의 끊임없는 교환은 관객들을 신과 신 사이의 짧은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극의 서사가 가진 아픔과 고통이 고이는 자리다.
02.
"살아간다는 건 서커스와 같아서 똑바로 서 있다가도 절실하게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이 작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장면은 지하철 운행을 위해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기관사 문영이 알약 하나를 삼키는 신이다. 신경안정제로 보이는 작은 알약 하나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이내 셔츠의 깃을 매만진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모습이지만, 내게는 이 모습이 영화 속 문영의 전부와도 같이 느껴졌다. 기관사로서 목격하게 되는 어떤 사고사와 그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힘들 것만 같은 인물이 몸의 매무새를 연이어 챙긴다는 것 자체가 해당 인물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다.
그 모습은 마치 이미지의 괴리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멀쩡한 사람이 어두운 자리를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나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로부터 전해지는 절망과 슬픔의 감정은 그 상태만으로도 극의 정서를 전달하는 힘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상태'에 놓인 인물의 태도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셈이다. 정제된, 자신의 공간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아니, 언제든 조용히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있는 준비.
문영의 이 장면에 대해 반드시 이야기했어야 하는 건 이 영화의 독특한 편집과 구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감독은 이 작품을 기억과 환상이라는 감각적 장소와 그 경계에서 구현해 내기 위해 여러 지점을 각기 다른 위치에서 오버랩하기도, 겹쳐두기도, 심지어는 하나의 장면조차 여러 자리에서 이어 붙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적어도 내게 이 영화의 시작이자 문영이라는 인물이 가진 내러티브의 출발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만 문영은 자신이 가진 계절의 흐름을 따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겨울. 상실과 상처의 시절이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파동>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영화에서 시간과 인물의 시점을 설정하는 일은 꽤 중요한 작업이다. 일반적으로는 감독에 의해 이미 정확히 결정된 채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아서 관객이 능동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물론 그런 경우에도 인물의 시점을 다르게 설정해 극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을 따라 영화를 관람하는 경우에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영화 <파동>에서는 양 시점의 자리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제시된다. 관객이 어떤 지점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애초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간단히 하나만 위시하자면, 문영이 서 있는 플롯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인물 간의 거리와 사건의 전후 감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험한 극의 해석을 이 지면에 모두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적어도 문영이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서 있는 플랫폼 위에서만큼은 성실히 현재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는 가정이라면, 상우와의 시점 거리를 조금은 먼 곳에 둘 수 있게 되고 극 중 상실의 의미를 기관사의 차창 너머가 아닌 두 사람 사이로 옮겨올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문영과 상우가 떠나게 되는 공간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다시 중요해진다. 신(Scene)의 순차적 흐름만 따르자면 두 인물이 동일한 시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플롯의 구성으로는 전혀 다른 시점 혹은 하나의 현실과 하나의 허구(상상)로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다. 특정한 장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소녀의 존재 또한 시간적 시점의 설정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처럼 관객이 능동적으로 작품의 이해와 해석에 닿아야 하는 부분은 영화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인물을 스크린 너머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마주하고 있는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문영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 실제로 놓여 있는가 하는 문제다.
04.
영화의 첫 장면은 암전된 화면 너머로 문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형태로 채워진다. 불시에 시각적 자극을 빼앗긴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남은 청각적 자극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뿐이다. 이때 문영의 대사는 어느 때보다 큰 에너지를 갖는다. 유난스럽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메마른 듯한 목소리. 그리고 이 모든 자극과 반응의 합은 극 전체의 톤과 매너가 돼 영화를 채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다.
극의 정서를 끝까지 유지하도록 만드는 힘은 분명 박가영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에 있다. 어둠에 삼켜진 채로 새벽의 시간을 표류하던 실루엣, 유리창 너머로 파리한 눈을 감고 작게 흔들리던 움직임, 그리고 잠긴 욕조로부터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도 침잠하던 표정까지.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보여왔던 자신만의 독보적인 이미지를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집약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보다 더 절실하게 물구나무를 설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파동>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결과적으로 닿게 되는 이해와 위로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깊이 개입하거나 정답을 제시하는 방법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한 번 떨어진 곳에서 마음을 전하는 극 중 인물 모두의 마음은 유난스럽지 않다. 단 한 번 상우가 내면의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에서만 응축된 감정이 발산되는데, 어느 쪽이든 모든 행위에는 결국 과거를 딛고 내일로, 겨울을 지나 봄으로 향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투영된다.
누구에게나 흔들리는 계절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몇 번의 계절이 다시 두터워지면, 처음의 시간처럼 돌아오는 계절을 매번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히 지워지는 것 또한 아니겠지만. 다 지나간 줄 알았던 겨울의 끝자락에서도 시린 추위는 때때로 모습을 드러낸다. 찾을 수 없는 사진 속의 장면을 헤매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다리기도 하면서 우리는 모두 그렇게 다음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 <파동>은 꼭 우리의 걸음을 닮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