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마크 로스코와 이우환의 특별한 만남, 둘의 공통점은 이것

페이스 갤러리 전시, "서신"(Correspondence), 오는 10월 26일까지

등록|2024.10.11 13:57 수정|2024.10.11 14:05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들이 한남동 페이스 갤러리에 와 있다. 그것도 로스코의 유산을 관리해 온 아들과 딸이 이우환(1936~) 작가와 함께 전시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더 특별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기대감을 가지고 지난 4일에 다녀왔다.

로스코의 작품을 오랫동안 존경해 온 이우환도 직접 참여해 로스코의 작품을 골랐다고 한다. 동, 서양 추상미술의 거장이라는 것 외에는 함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두 작가인데, 이렇게 함께 보니 두 작가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로스코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10대때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항상 고향인 유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스코의 아들 크리스토퍼도 아버지가 "미국인 이라기 보다는 뉴요커"라고 수긍한다.

이우환도 1956년, 21세때 일본으로 가 정착했고 유럽에서 활동해 국가적,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 왔다. 그만큼 두 화가 모두 경계인으로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과 예술을 형성해 왔다.

예술이 철학이 될 때

로스코와 이우환, 두 화가가 남긴 책들을 읽고 있자면 철학자, 구도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로스코는 과거 사제나 철학자가 했던 역할을 예술가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였다. 로스코는 색의 관계나 형태에 관심이 있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들,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로스코의 아들 크리스토퍼 또한 아버지의 그림에 대해 로스코가 색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며 작품이 보는이의 영혼을 투영시키는 '영혼의 창'이었다고 밝힌 바 있듯이 고요하고 명상적인 로스코의 그림앞에서 우리는 그림 자체가 아니라, 잊고 살았던 우리의 영혼, 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 마크 로스코 'No. 16 {Green, White, Yellow on Yellow}'(1951) ⓒ Pace Gallery


로스코 사후에 그가 쓴 원고가 발견되어 자식들에 의해 <예술가의 창조적 진실>(2024)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는데, 그의 글들을 보면 로스코의 예술이 지극히 내밀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탐구의 결과물 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들 크리스토퍼는 그의 저서<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2024)에서 로스코의 원고가 그가 겪은 예술적 변화의 일부였으며, 그가 직접 글을 쓰지 않았다면 로스코의 양식적 변화가 더 늦게, 혹은 다른 방향으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글이라는 매개체가 로스코의 예술철학에 근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우환도 글과 뗄 수 없는 화가이다. 그는 1961년에 철학공부를 끝내고 1969년 평론으로 일본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혔다. 그의 글은 물체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미학적인 면을 발견하는 '모노하'운동에 근간이 되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예술적 표현은 무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할 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드러내거나 그 위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더 생생하게 보이게 하는 것" 이라고 썼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했다. 그에게 예술이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보다는 사물을, 존재 그자체를 더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가 예술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였다. 사물, 시간, 공간,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의 무뎌진 감각들이 강렬하게 자각되는 이유이자, 그의 작품이 응축된 시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 이우환 'Dialogue'(2018) ⓒ 전사랑


전시된 <Dialogue>(2018)에서처럼, 예술의 공간적 경험은 이우환에게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는 내 개의 대형 캔버스를 경첩으로 연결해 병풍처럼 만들어 작품을 공간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의도했다. 벽에 걸리지 않은 병풍을 배치해 "그림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면서, 보다 역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 이우환 작품을 감상중인 관람객 ⓒ 전사랑


텅 빈 캔버스 바탕에 붓 한자국. 어쩌면 관람객을 낯설고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겠다. 화면이 꽉 채워진 로스코의 작업과 달리 이우환의 작업은 텅 비어 붓 자국만을 보여줄 뿐이다. 질케 폰 베르스보르트-발라베가 저서 <이우환: 타자와의 만남>(2008)에서 지적하듯이, 서양 문화가 "비어 있음을 부정적으로, 가득 채우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 반면,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채움과 비움, 존재와 비존재를 함께 생각하고 서로 역동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 비움 속 붓자국은 작가가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호흡을 조절하고 몸 안에 있는 리듬을 느끼며" 완성한 수행의 시간과 공간을 응축시킨 결과물이다. 이우환의 <Dialogue>의 공간속으로 들어가 캔버스의 직물 조직, 텅 빈 캔버스, 한번의 붓질로 완성한 색채가 이루는 조응을 느껴보자.

▲ 이우환, (2018) ⓒ 전사랑


로스코와 이우환, 두 작가의 예술 모두 관람자에게 요란스럽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예술은 시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영역으로의 초대이다.

로스코-이우환의 2인전의 추상회화 속에서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지 어렵게 찾을 필요가 없다. 예술을 위해 자신을 단련했던 두 작가 처럼, 그저 작품을 바라보며 현대인이 잊고 지냈던 감각들, 내 마음 속 깊숙한 곳 어딘가를 바라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로스코의 작품은 사진촬영이 금지된 갤러리 공간에 어둡게 전시되어 있다.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명상과 성찰을 유도하고자 했던 로스코가 작품이 명상적인 공간에 전시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로스코의 작품 앞에 오랜시간 서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로스코의 바람대로 바쁜 스케줄로 잊고 살았던 깊은 감정에 몰입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반면 이우환의 그림들은 쏟아지는 자연채광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안과 밖, 여백과 채움, 그 사이에서 조화롭게 조응하고자 했던 이우환의 작품들과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작고한지 50년이 지난 마크 로스코, 그리고 이우환의 만남. 산자와 죽은 자가 주고 받는 영혼의 서신 들은 현란한 감각에 지친 우리의 영혼에 깊은 쉼을 선사하고 있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