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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시베리아 차지한 비법 알고보니... '이것' 때문이었다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등록|2024.10.10 14:45 수정|2024.10.10 14:45
시베리아(Siberia)는 러시아의 지리적 중앙부 지역을 통칭한다. 한국에서는 '춥고 척박한 오지'의 대명사처럼 널리 알려져 있다. 광대한 러시아 국토의 77% 정도를 차지하는 시베리아는, 흔히 추운 기후 때문에 버려진 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를 부국으로 만든 경제적 원천을 품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광대한 시베리아를 얻게 된 과정 이면에는 수많은 동물 학살과 원주민 착취, 자연 생태계 파괴 등, 인간의 그릇된 탐욕이 빚어낸 비극의 역사가 존재했다. 지난 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모피를 향한 탐욕이 만든 땅, 시베리아'편을 통하여 오늘날 러시아의 판도를 바꾼 모피 사냥의 역사와 그 어두운 이면을 조명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시베리아 영토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19세기 탐험가 조지 케넌은 "미국을 통째로 들어서 시베리아 한복판에 갖다 놓아도 시베리아 변두리에는 닿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베리아 영토의 광대함을 강조하며 했던 발언이다. 실제로 시베리아는 오늘날 대국의 대명사로 꼽히는 미국이나 중국의 영토보다도 훨씬 크며, 대한민국 영토의 130배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베리아는 특유의 춥고 척박한 기후 때문에 대부분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지역들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마을로 꼽히는 오이먀콘은 1월 평균기온이 영하50도, 최저기온 영하71도에 이르며 뜨거운 물을 뿌리면 공중에서 눈처럼 변하는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혹독한 기후 때문에 땅이 항상 얼어있어서 농작물 재배 역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시베리아에는 오랫동안 소수의 원주민만이 거주하며 수렵과 사냥을 통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먼 거리를 이동할 수단이 없다 보니 원주민 간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자연히 시베리아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암흑의 땅'으로만 여겨왔다.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시베리아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러시아가 루스차르국 시대이던 16세기 후반부터다. '뇌제' 이반 4세가 버려진 땅 시베리아가 주목하게 된 계기는 바로 '검은 황금'으로 불리던 모피 때문이었다.

모피는 동물의 털가죽으로 고대부터 가방, 목도리, 모자 등 다방면에서 활용되어 왔다. 당시 성체 다람쥐 모피 18장의 가격은 은화 한 닢의 가격과 맞먹었고, 1장만으로도 성인 남성의 1인분 식량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높았다.

유럽왕실의 사치품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특히 모피의 가치가 급등한 것은 중세 유럽 왕실에서 모피를 사치품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3세기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다람쥐 모피를 해마다 무려 2만 벌이나 구입했다고 한다.

유럽 왕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군주나 왕족들이 항상 특별한 행사 때마다 신분을 상징하는 예복으로 모피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복의 소재로 주로 사용되던 어민(흰담비)은 빛깔이 아름다운 흰털로 유명했고, 하나의 모피 옷을 만드는데 수십 또는 수백 마리가 처참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검은 담비 모피 역시 인기가 높았다. 모피 사랑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헨리 8세는 아예 담비 모피는 최상류 귀족들만 착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헨리 8세가 남긴 초상화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담피 모피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16세기 들어 절정에 달하여 200여 년간 전 세계에 지속된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모피 소비에도 큰 변화가 발생한다. 극심한 추위에 시달린 인류는 생존을 위하여 상류층과 서민을 막론하고 방한 의류를 구해야만 했고 자연히 모피의 수요가 크게 높아지게 된다.

자연히 '모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모피 한 장의 가격으로 다수의 소, 말, 양이나 집 한 채의 가격보다 더 높아질 정도였다. 상류층이 아닌 평범한 서민이 40년을 꼬박 일해야 겨우 질 좋은 여우 모피 한 장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가격이 폭등했다. 돈에 눈이 먼 모피 상인들은 좋은 모피를 구하기 위하여 더욱 혈안이 됐다. 날씨가 더욱 추운 러시아의 모스크바 인근에서는 모피수(털가죽을 가진 짐승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고 한다.

혹한의 날씨에도 다양한 야생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베리아는 '황금이 굴러다니는 땅'으로 불리며 뒤늦게 인간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상업과 정치후원으로 번성했던 러시아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이반 4세로부터 시베리아 개발권과 모피 무역을 선점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시베리아는 아직 러시아의 행정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에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코사크 출신의 산적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베치라는 인물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시베리아 정복을 맡긴다. 1582년 예르마크의 모피 원정대는 시베리아 서부에서 타타르인이 세운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며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고 이반 4세부터 '시베리아 공후'라는 작위까지 얻었다.

이 당시 러시아에서 모피 무역은 국가 재정의 약 10-30%를 차지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모피 무역에서 얻은 수익이 러시아 경제의 강화에 큰 역할을 할 정도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반 4세의 뒤를 이은 아들 표트르 1세는 이제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시베리아를 관리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국가 주도로 모피를 약탈하기 위한 군대가 공식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모피 원정군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모피 원정군은 시비르 칸국을 완전히 멸망시킨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을 이어가며 각지의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강제로 복속시켰다. 처음에는 순진하던 주민들을 기만하여 모피를 챙기던 러시아는 목표했던 수량이 부족해지자 본색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무력으로 야사크(YASAK) 제도를 도입하여 원주민들에게 일정량의 모피를 세금으로 강제 공납하게 했다.

러시아군은 원주민들을 약탈했고 반항하는 이들은 잔혹하게 처형했다. 가족이나 족장을 인질로 잡은 뒤 야사크를 받고 나면 그제야 풀어주기도 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러시아군의 협박으로 '피 묻은 칼에 강제로 입을 맞추면서 영원히 야사크를 바치고 러시아에 복종하며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러시아 모피 원정대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빼앗은 모피를 다시 구매하여 야사크를 내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모피 대신 저당 잡힌 땅을 빼앗기고 빚이 늘어나다가 결국 노예처럼 팔려 가는 비참한 악순환을 거듭해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많은 원주민들은 200여 년 전 자신들의 조상이 진 빚까지 갚는 일도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왔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모피 원정대가 침략 과정에서 옮겨온 전염병으로 인하여 약 50%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 강국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에 저질렀던 약탈과 학살의 '러시아판' 버전이 바로 시베리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이러한 러시아 모피 원정대는 의외로 한국사와도 인연이 있었다. 17세기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의 나선정벌(1654-1658)은 바로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원정대와 두 차례 교전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조총 부대가 맹활약을 펼치며 조청연합군은 러시아 원정대의 남진을 막아내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립한다.

끝없는 '피의 모피 착취'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결국 세계 경제의 대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러시아는 거듭된 약탈과 사냥으로 시베리아에서도 점차 모피수의 씨가 마르기 시작하자 또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결국은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 북미의 알래스카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로써 18세기 러시아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 북미를 잇는 약 2천 2백만km에 이르는 역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북미에 교두보를 확보한 러시아는 한때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하여 당시 멕시코 영역이던 포트 로스를 점령하고 러시아 정착촌을 건설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알래스카의 해달 개체수 감소로 모피 사업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고, 북미에서 미국과 캐나다가 모피 사업에 뛰어들며 러시아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모피 사업이 위축되면서 러시아는 1841년 결국 포트 로스를 멕시코에 매각하고 철수한다. 모피 사냥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영토 확장이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캘리포니아를 끝으로 200여 년 만에 겨우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제 러시아의 모피 원정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동물의 가죽을 노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과 동물이 이 과정에서 비참하게 희생을 당해야 했다. 모피 사냥으로 인하여 몇몇 동물이 아예 멸종당하거나 현재 멸종 위기에 놓였다.

또한 현대에도 계속되는 사냥꾼들이 잔혹한 동물사냥 모습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어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환경단체 <휴먼 소사시어티>에서 공개한 캐나다의 바다표범 사냥은 인간의 욕심으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동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러시아 제국은 검은 황금인 모피를 얻기 위한 욕망으로 시베리아를 넘어 미국까지 진출했고, 결국 세계 영토 면적 1위에 오르며 영광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인간의 그릇된 탐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의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역사에서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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