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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 입은 손님이 건넨 말, 내 행동을 바꿨다

계산원 10년 경험하며 터득한 '적절한 속도'

등록|2024.10.15 20:01 수정|2024.10.15 20:01
계산원으로 일하다 보면 유독 긴장되는 손님이 있고 마음이 편한 손님이 있다. 단순히 인상이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내 생각엔 계산할 때 건네는 일련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과 속도에 달려있다. 처음엔 그 차이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트와 편의점 등 계산원 경력 도합 10년 정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결국 계산대도 의사소통의 자리라는 걸. 아무리 짧은 대화라도 서로 맞춰가는 노력과 눈치가 필요하다는 걸.

어떤 손님은 시간이 금이라는 듯 내 말을 낚아채듯 대답하며 얼른 마트를 나가고 싶어했다. 어떤 손님은 시시한 농담을 던지거나 엊그제 사간 단호박 맛이 좋았다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자의 손님 앞에서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허둥거리게 되고, 후자의 손님 앞에서는 얘기를 언제까지 들어드려야 하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만약 모든 손님을 이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면 각각 적당히 대처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양극단 사이에 있는 수많은 유형이 등장한다.

계산원의 속도

▲ 계산원으로 일하다 보면 유독 긴장되는 손님이 있고 마음이 편한 손님이 있다. 계산이라는 단순한 행위 안에도 다양한 태도가 드러난다.(자료사진). ⓒ sql on Unsplash


한때는 계산원으로서 무조건 빠르게 계산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쫓기듯 행동했다. 물건 바코드를 찍고 다 찍자마자 회원번호를 묻고, 수량이 많으면 담아갈 종량제 봉지가 필요한지 묻고, 카드, 현금, 상품권, 카카오페이, 계좌이체 등 손님이 고르신 결제 방식대로 계산을 마쳤다.

내가 봐도 내가 좀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를 편안해 하시는 손님 비율이 꽤 높았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내가 말하는 속도나 손놀림이 빨라지면 손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계산을 빨리 끝낼수록 만족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꼼꼼하게 산 물건을 확인하고 차분히 장바구니에 담고 싶어하는 손님도 있다.

그런데 계산원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계산을 끝내고 다음 손님 물건을 찍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밀려나듯 계산대를 떠나야 한다. 계산은 돈을 다루는 행위이다. 부랴부랴 해치우면 누군가는 불안함이 생긴다. '내가 제대로 계산한 거 맞나?'

손님은 차근차근 상품별 가격을 확인하며 물건을 담고 있는데 재촉하듯 회원 번호를 묻고, 어서 지갑을 꺼내라는 듯 총 금액을 말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뒤늦게 낯뜨거워졌다. 손님을 해치워야 할 귀찮은 일거리 즈음으로 여긴다고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사실 이런 성찰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편의점 단골 손님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는데 그는 매주 군복 차림에 큰 가방을 메고 왔다. 점심 시간에 와서 빵과 우유, 또는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산 뒤 파라솔 밑에서 먹고 쓰레기까지 말끔하게 치우고 갔다.

내가 그 손님을 오래 기억하는 까닭은 단지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매장에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그가 보여준 몸에 밴 예의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매장에 들어와서 바로 필요한 걸 찾으러 가지 굳이 계산원에게 인사하진 않는다. 나는 일단 문이 열리면 "어서 오세요"하고 맞이 인사를 건네지만 열에 아홉은 아무 반응도 없다.

늘 대접받는 기분 들게 하던 이 손님

물론 그렇다고 무응답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중엔 낯을 가리는 손님도 있을 테고, 마음이 급해서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사람도 있을 테고, 으레 하는 인사겠거니 기계적으로 느낀 사람도 있을 테니까.

▲ 편의점 단골 손님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 매주 군복 차림으로 왔다.(자료사진,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goldenantelope on Unsplash


하지만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눈길을 주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았다. 정석으로 되돌아온 인사에 오히려 계산원인 내가 깜짝 놀랐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인사는 바르고 정중했다.

그는 뭘 살지 고민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20~30초 남짓 매대를 쭉 훑어보고 덥석 물건을 집었다. 계산대에 가져와서는 내가 바코드를 다 찍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할인이나 적립이 있느냐는 질문에 귀찮은 내색 없이 "없습니다"하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가격을 말하자 그는 한 손으로 카드를 건네면서 반대손을 바로 뒤쪽에 갖다대어 가볍게 받쳤다. 내가 늘 손님들의 카드를 받고 드리는 방식이었는데 손님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하는 내 인사에도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건을 사는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당한 시간을 들여 충실히 밟아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가 나가고 나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주고받은 말만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었지만 뭐랄까,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계산원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존중받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물론 전에도 나에게 음료수를 사주거나 따뜻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등 친절을 배푼 손님들이 있었다. 그 때는 감사한 마음이 컸다면 지금은 대등한 관계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서 어깨가 펴졌다.

▲ 군인 손님은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간단한 끼니거리를 사갔다. ⓒ 김아영


그는 매주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했고, 매번 매순간 흐트러짐 없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 손님이 다녀가고 나면 전엔 없던 기운이 생기고 일에 의욕이 생겼다.

'겨우 1~2분 만나는 건데도 누군가의 태도가 한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좌지우지하는구나. 앞으로는 아무리 피곤해도 손님들을 절대 대충 상대하지는 말아야겠어.'

이런 다짐을 하게 해준 게 고마워서 밖에서 제대로 된 도시락이라도 사서 드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관뒀다. 이성적인 관심을 갖는다는 오해를 사기 싫었고, 무엇보다 끼니를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는 내 처지를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쪽으로 마음이 잘못 전달 될 것 같았다.

그의 꼼꼼하고 결곡한 성미가 군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인지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해 본다. 그 또한 어딜 가든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우를 받고 살아가길 지금도 바란다.

우리는 다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이제 나는 손님이 계산대에 물건을 놓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이 짐작이 간다.

▲ 이제 손님이 계산대에 물건을 놓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이 짐작이 간다. ⓒ 김아영


'이 손님은 좀 빠르게 계산해야지, 혹은 좀 천천히 해야지'... 그리고 이런 예상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또 달라진 점은 전에는 POS기 화면만 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면, 이제는 손님이 뭘 하는지 보면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

지갑에서 카드가 빠지지 않아 낑낑대고 있으면 나는 일부러 주변을 괜히 정리하는 여유를 부리며 손님의 조급함을 덜어드리고, 잠시 정차해 놓은 차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밖을 돌아보면 민첩함을 최대한 끌어올려 단숨에 계산을 끝낸다.

우리는 다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생각하는 속도, 움직이는 속도가 저마다 다르다. 주변은 살피지도 않고 제 속도로만 밀어붙이면 누군가 마음 상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의 속도를 감지하고 거기에 맞추다 보면 즐거운 박자가 생긴다.

내가 하루에 손님 이백여 명을 관찰하고 상대하며 얻은 교훈이다. 미리 약속한 듯 쿵짝쿵짝 제때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카드를 주고받는 타이밍까지 손발이 척척 맞는 손님을 만나면 그렇게 보람차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그게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서로를 살뜰히 관찰하며 만들어낸 결과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손님도 같은 걸 느끼시는지 나가실 때 "인상이 참 좋으세요"라거나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해주신다. 계산 업무는 분명 같은 말을 수백 번 반복하는 일인데도 이렇듯 자꾸 새로운 배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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