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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윤석열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지역은 어떻게 블랙리스트를 재생산하나

등록|2024.10.16 07:03 수정|2024.10.16 08:01

▲ 2016년 11월 4일 '박근혜 퇴진 문화예술인 시국선언'(7,449명, 288단체 참여)이 4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우리 모두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모습. 시국선언 뒤 참가자들이 광화문광장에 '박근혜 퇴진' 천막을 설치하자 경찰들이 강제철거하고 있다. ⓒ 권우성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지원 배제의 정황이 발견되고 문화예술인들이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에 은박지를 두른 채 농성 투쟁에 들어갈 때는 이 일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국가가 자행하는 예술검열에 대한 저항과 공공지원 제도를 이용해 예술인을 길들이고 배제하려 한 박근혜 정부에 대한 예술인들의 저항의 의지는 높았으나 투쟁을 통해 만들어 갈 변화가 무엇일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최순실 게이트 등이 폭발적으로 결합하면서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던 예술인들은 거대한 시민의 물결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예술이 한 사회의 변화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라는 말을 실감하고, 예술이 시민의 삶과 정치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건져올린 변화

박근혜 탄핵이 결정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예술인들의 관심과 요구는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 예술인 구제와 향후 이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 마련에 집중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2017년 7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출범으로 이어졌고, 위원회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교묘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진상조사위의 1년여 간의 조사 과정을 통해 약 9천 명의 예술인과 340여 개 단체의 피해 사실이 확인 되었고, 직간접적으로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한 공무원과 산하기관 임직원 등에 대한 수사 및 징계 의견이 제출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단순히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각 문화예술 지원기관의 혁신과 제도 개선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각 기관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였던 시도였다. 물론 지금 현시점에서 당시에 제출 되었던 제도 개선 방안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 전문적인 조사 작업을 수행한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윤주 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태의 경우 국가가 행한 불법적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책임을 묻고 불법을 행한 주요 지시자들에 대해 그 죄책을 물어 책임지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상조사위 활동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사례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주요 책임자들 중에는 교묘하게 그 책임을 비켜간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적어도 이념과 정치적 이해에 따른 예술 검열과 배제, 예술 지원제도의 사유화와 예술인의 권리 보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진상조사위 활동을 바탕으로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 되었고, 예술 지원 기관별로 운영의 투명성과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협력적 거버넌스 플랫폼이 여러 형태로 만들어졌다. 물론 예술인권리보장법은 공공부문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자를 규율하는 구체적인 책임 조항이 빠지고, 조사관의 권한과 신분의 독립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등 반쪽짜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적어도 하나의 구체적인 기준점이 생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예술인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기대하게 하였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7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맞선 저항과 진상조사위 활동이 종료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시계는 빠르게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블랙리스트의 최초 실행자 중 한 명이었던 유인촌씨가 다시 문화부 장관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당시 문체부와 산하기관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에 적극 가담했던 이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블랙리스트 사태 자체를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변화는 지역문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의 지자체 중 한 곳의 문화재단에서 전시 참여 작가에 대한 계약 배제와 이로 인한 전시 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당 문화재단의 대표는 공개적인 논의 석상에서 "출연금을 받는 기관의 장으로 지자체를 불편하게 하는 단체와는 일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가 하면, 이미 예산편성이 끝난 특정 단체와의 사업을 임의로 변경하거나 백지화 하는 등 우리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과정에서 문체부와 지원기관에서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이 어떠한 의도인지는 상관없이 합법적이고 행정적 권한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방정부 하에서의 블랙리스트 작동 체계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경험했던 중앙정부 하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블랙리스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와 같이 국가가 주도하는 블랙리스트 작동 체계는 이념적 기준이 주요한 기준선으로 작동한다. "좌 편향된 문화예술계의 균형을 잡겠다"라는 것이 블랙리스트 실행의 주요 알리바이였으며 이는 분명 문화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반면 지방정부 하에서 벌어지는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주로 지자체장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무적 판단과 다양한 지역 이해집단 간의 경제적 투쟁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지방정부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블랙리스트 작동 체계는 불가피한 지역 정치의 일부이거나 당사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으나 공적으로는 정당한 절차인 양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 질서 하에서 이념적 지형이란 것이 과거와 같은 체제 간의 경쟁 구조가 아닌 정치적이자 경제적 이익 결사체 간의 상호투쟁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과거와 같은 이념적 지형이 검열과 배제의 기준선이 된다는 접근은 블랙리스트라는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가리는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지역'이란 단위에서의 블랙리스트 작동 구조는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권력, 행정 권력이 어떻게 지역 주민과 예술인들은 길들이고 배제하는가, 어떻게 그들의 이익을 재생산하기 위하여 공공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하느냐는 맥락 아래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

▲ 블랙리스트 일러스트 [제작 이태호] ⓒ 연합뉴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정책은 '문체부의 정책'이란 개념이 강했다. 말 그대로 국가 주도의 진흥과 육성, 인위적인 활성화가 주요한 정책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지역 중심의 문화정책과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과거 중앙정부 차원에서 시행되던 많은 정책과 사업이 지방정부로 이관되거나 아니면 지역 주도의 새로운 문화정책이 제안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지역문화 진흥법 제정 이후에는 광역 및 기초에 속속 문화재단이 만들어지면서 현재 지역문화재단의 수는 130여 개에 이르며 각 문화재단마다 운영하는 공연장, 도서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까지 합한다면 지역 중심의 문화 현장은 끝없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술인들의 창작활동과 예술 노동의 영역도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사회 변화와 맞물려 문화와 예술의 영역은 지역 안에서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반면 지방정부와 지역문화기관, 그리고 그곳에 종사하는 주요 인력의 문화와 예술 정책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은 전혀 담보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지방정부 하에서의 블랙리스트와 검열, 차별과 배제에 관한 수많은 사례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블랙리스트 사태라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도 변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지역문화라는 장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 차별과 배제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사회적 원칙과 기준이 일상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야 지난한 공론화와 숙의, 갈등과 소통이 이어지며 그 촘촘한 얼개가 만들어지는 일이기에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만들어 질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후자의 문제는 블랙리스트 특별법과 같이 법적 기준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그에 따른 법적·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한다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이다. 현재의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예술인 권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반영하지 못한 만큼 현시기 블랙리스트 특별법의 제정은 적어도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공적 기준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하의 예술인은 끊임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블랙리스트로 상징되는 차별과 배제는 인간의 창의적 사고와 삶에 대한 도전 의지, 타인과의 소통과 연대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때문에 블랙리스트 문제는 예술인의 문제이면서 이와 동시에 시민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재앙이다. '지역'은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본질적 속성이 드러나는 장이며 동시에 이를 뛰어넘을 가능성의 장소이다. 이제 시선을 조금 돌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일상의 블랙리스트를 바라봐야 한다. 그곳에서 다시 변화의 기반을 하나씩 쌓아 올려야 할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하장호는 공유성북원탁회의 운영위원, 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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