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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떳떳하게 "청소하러 다닌다" 말합니다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1-2] 무지개 같은 나의 삶, 살기 위해 투쟁도 열심히

등록|2024.10.10 11:42 수정|2024.10.10 11:50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1-1 ]
'아들'만 최고였던 시절, 송아지 대신 중학교 택한 이유

2010년 남편의 CD 케이스 제작 일을 돕고 있었는데 MP3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수입이 거의 줄어들었다. 매달 나갈 돈은 있고 딸, 아들을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막막했다. 56세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청소일 뿐이었다. 식당 일은 이전에 남편 사업이 망했을 때 3년 해 봤기에, 청소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집 가까이에 서강대가 있지만, 자리가 없어서 공석이던 연세대 대우관(경제 경영) B1, B2 층 일을 하게 되었다. B1 층에는 큰 강의실 3개, 화장실, B2 층에는 동아리방 26개, 카페, 식당, 편의점, 복사실, 휴게실 등이 있다.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많아 쓰레기가 엄청났다. 앞에 일하던 사람도 많은 양의 쓰레기 때문에 욕하면서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1시간 자고 출근한 적도 있다. 잠이 부족해 퇴근길이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고 '죽음이 아니면 일을 달라!'는 각오로 하루하루 버텼다.

첫 출근을 하는 날, 관 노조 간부의 소개로 가입비 5000원을 들고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 가입 이전에는 노조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노조 집회 현장을 봤을 때도 시끄럽고 질서를 깨는 것 같아서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노조 간부와 노조에 가입하러 갈 때 왜 노조에 가입해야 하는지에 대해 들었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말은 없다. 그때는 전 조합원이 민주노총 소속이었고,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심지 뽑기로 노조 운영위원이 되다

입사 다음 해인 2011년 1월 노조 운영위원을 뽑는데, 아무도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아, 심지 뽑기로 선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노조 운영위원이 되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도 서툰데, 과연 운영위원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동료들한테 "열심히 해보겠다.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운영위원은 관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하고, 관으로 돌아와 회의 내용을 전달하고, 부당한 일이 있을 때 집행부와 함께 원청 항의방문을 가고, 집단교섭 사업장 연대투쟁에 참여하는 등의 일을 한다.

운영위원이 되자마자 3월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때 조합원이 370명, 운영위원이 40명이었고 근무조건이 시급 4300원, 한 달 월급 89만 원, 노동시간 8시간, 휴게시간 2시간이었다. 그 당시 휴게실에는 에어컨과 샤워시설도 없었고, 휴게실이 지하 계단 밑에 있는 곳도 있었다. 그해 3월 이대, 고대, 홍대와의 연대를 통해 시급 4300원에서 300원 인상을 요구하며 전 용역 책임자의 부당노동행위, 그리고 체불임금에 맞서 한 달이 넘게 투쟁하였다.

투쟁 방식은 어느 사업장이나 비슷하지만, 연대를 통하여 사람 수를 늘리는 식이었다. 사람 수가 투쟁의 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 하나라도 보태서 힘이 된다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쫓아다녔다.

투쟁, 투쟁, 투쟁

▲ 2018년 청소경비주차 노동자 투쟁 자료사진 ⓒ 공공운수노조


나는 강의실을 쫓아다니면서 수업 시작 5분 전에 양해를 구하고, 학생들에게 우리가 왜 파업을 통해 투쟁해야 하는지 알렸다. 학생들은 공감해 주었고, 지지 서명도 많이 해주었다. 투쟁하면서 청소를 하지 않자, 곳곳에 먼지가 쌓였다. 화장실은 변기가 막혀 바닥에 변이 쌓였고, 복사실에서 쓰고 있는 옆 창고에까지 똥물이 들어가기도 했다. 쓰레기장에는 쓰레기 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총파업에 들어갔을 때, 소장이 와서 "송영호씨! 쓰레기 좀 치워가면서 하라!"고 했다. 나는 "총파업인데 왜 일을 해요?"라며 강하게 저항했고, 노조 지침을 철저히 따랐다. 투쟁 중 조합원간 갈등이 생겼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합원들에게 우리가 투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화합하고 단결해야한다는 걸 강조했다.

투쟁 기간 중 남편이 출근시켜주는 차 안에서 파업가를 불렀다. 남편이 "나 이 다음에 집에서 안 쫓아낼 거지?"라고 말했다. 집안에서 조용히 살림만 하고 남편이 안 벌어다 주면 굶어 죽을 거라 생각했던 아내가 열심히 투쟁하는 모습에 놀랐던 모양이다.

투쟁 중에는 노동가를 많이 불렀고, 대중가요를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다. 늠름한 학생들이 연대해주었고, 전 조합원이 똘똘 뭉쳐 싸웠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승리하는 날 노천극장에서 학생들과 조합원이 한자리에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모두 기뻐했다.

그해 홍대에서도 용역회사가 바뀌면서 민주노총 조합원을 집단 해고하는 바람에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져 한동안 연대투쟁 하러 갔었다. 그 후에도 서울여대 동문회 행사가 있던 날 총장 면담을 요구하면서 차를 에워쌌던 일도 있었고, 신촌에서 시급 만 원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70살 되었지만, 2년 더를 위해 힘내련다

12년 동안 운영위원을 하면서 서울 시내에 안 가본 대학교가 없을 정도였다. 연대를 하러 현장에 갔다가 내가 처해있는 환경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볼 때면, 동지애를 느끼면서 힘껏 연대를 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내가 힘을 받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살았고, 결혼해서는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 많은 날을 인내하며 살았다. 그동안 억누르고 살았던 감정들을 투쟁 현장에서 팔뚝질하며 많이 쏟아낸 것 같다. 청소 일을 하는 나에게 노동조합은 꼭 필요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던 것들을 조합원들과 힘을 합하여 투쟁을 통해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투쟁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적으로 막막해서 청소 노동으로 뛰어들었고, 일을 시작했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떳떳하게 "청소하러 다닌다"라고 말하고 있다. 70살이 된 지금도 새벽 4시만 되면 오뚝이처럼 일어난다. 하지만 요즘 들어 집에서 살림을 할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신체 기능이 약해진 것 같고, 특히 관절 쪽이 좀 안 좋은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결혼 전에 "다른 집 애들은 돈도 잘 버는데 너는 왜 그래?"라고 하셨던 엄마 말씀이 나를 힘 나게 한다.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치료받아가며 2년 남은 정년을 잘 마치고 싶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소박한 내 삶을 위해...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연세대학교분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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