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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관심' 사리구? 이해관계 따라 졸속 처리 피해야

[김종성의 히,스토리] 일제강점기 때 한국 밖으로 반출된 사리구의 주인공들

등록|2024.10.11 10:51 수정|2024.10.11 10:51

▲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10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가유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반환 협상을 촉구한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가 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가유산청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됐다. 보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이기현 의원은 사리 보관 용구인 이 유물을 '영구 반환'이 아닌 '대여 형태'로 들여오는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김 여사의 성과를 부각시키기 위한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같은 당 민형배 의원은 김 여사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정부보증 하에 대여 형태로 들여오는 쪽으로 협상이 이뤄졌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이번 협의는 반환이 시작된 새로운 하나의 시작, 물꼬가 트인 것으로 봐야 한다"며 지금 진행 중인 협상에 의의를 부여했다.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는 몽골제국(중국식 국호는 원)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티베트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나타났다. 2022년에 <동악미술사학> 제3호에 실린 정은우 동아대 겸임교수의 논문 '고려후기 라마탑형 사리구 연구'는 이 사리구의 모델이 된 라마탑에 관해 "상륜부에 해당하는 탑찰은 13천(天)을 의미하는 열세 개의 원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원반형의 화개(華蓋)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작은 라마탑이 정상부에 놓여 있다"고 묘사한다.

그런 뒤, "라마탑의 이러한 기본 구성 방법은 인도식 탑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13천을 의미하는 열세 개의 원반과 화개 등은 인도탑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라마탑 독창의 요소이며, 또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점 역시 특징적"이라고 설명한다.

▲ 본문에 인용된 논문에 제시된 라마탑형 사리구의 모형. ⓒ 정은우, 동악미술사학회


그 같은 특징을 담은 라마탑형 사리구가 일제강점기 때 한국 밖으로 반출돼 강점기 후반인 1939년에 미국 보스턴미술관으로 반입됐다. 이를 되돌려받기 위한 협상이 2009년에 시작됐고, 남북 불교계의 공동성명이 2011년에 나왔다. 남한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과 북한의 조선불교도련맹중앙위원회 서기장 리규룡이 공동 발표한 '보스톤미술관은 라마탑형 사리구를 반환하라'는 성명은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혜문스님의 혜문닷컴에 게시된 성명이다.

"부처님과 지공, 라옹선사의 사리가 봉안된 라마탑형 사리구가 현재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되여 있다. 이 사리구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 또는 황해북도 개성시 화장사 유물로서 일제강점기 왜놈들이 도굴하여 미국에 팔아먹은 것이다. 때문에 보스톤미술관이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략탈 문화재로서 정상적인 거래 대상이 아니다."

이 시기의 논의는 2013년에 중단됐다. 그랬던 것이 김건희 여사의 제안으로 재개되면서 영구 반환이 아닌 일시 대여 조건으로, 거기다가 '대여 뒤에 한국 정부가 반환을 보증한다'는 조건까지 덧붙여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반환을 보증하게 되면, 사리구 소유권이 한국에 없다는 인상이 굳어질 우려가 있다. 반환이 아닌 대여를 선택하게 되면 당장에 국내로 들여올 수는 있겠지만,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잃을 가능성이 있다. 당장에 김건희 여사의 위신을 세워주고자 이런 식의 졸속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게 국감장에서 나온 지적이다.

사리구의 주인공,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 회암사 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 회암사 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김 여사가 관심을 표시한 사리구의 주인공들은 석가모니와 더불어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다. 이들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조선 건국의 멘토인 무학대사가 스승으로 모신 스님들이다.

위 성명에 언급된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는 인도 승려인 지공선사가 고려 공민왕의 아버지인 충숙왕 때인 1328년에 건립했다. 이 해는 무학대사가 태어난 이듬해였다. 이 당시 고려에 체류한 지공선사가 대궐 같은 이 사찰을 건립했다.

훗날 이곳에 세워진 무학대사비에 따르면, 노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순천 송광사로 출가한 무학대사는 26세 때인 1353년에 몽골제국으로 유학가 3년간 공부했다. 이때 모신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고려인)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고려 불교계도 이 영향권하에 있었다. 지공의 제자인 나옹은 훗날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됐다. 이런 승려들의 제자가 된 것이 무학대사의 앞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학대사비에는 지공대사가 몽골제국에서 무학을 처음 만났을 때 했다는 한마디가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지공은 처음 만난 무학에게 "고려인 모두가 죽겠구나"라고 말했다. 대단한 제자가 들어왔다는 말을 그렇게 했다.

그 뒤에 만난 나옹선사도 무학에게 감탄했다. 남의 도움을 빌려 깨닫는 방식인 학(學)을 거부하고 자기 내면을 주체적 방식으로 성찰하는 방식인 무학(無學)을 추구하는 이 제자가 식사 공양도 거른 채 선정에 빠진 모습을 보고 나옹선사는 "너 죽었냐?"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29세 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무학은 36세 때 모교인 송광사의 주지가 됐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시대 초반에 나옹선사가 입적한 뒤로는 무학이 자연스럽게 고려 불교계 지도자로 떠올랐다.

우왕은 그에게 왕사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고사했다. 고려의 운명이 다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다. 서산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에 따르면, 무학은 고려 멸망 8년 전인 1384년 이 사찰에서 이성계가 장차 왕이 되리라는 해몽을 했다. 왕이 되리라는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이 절은 석왕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런 뒤 무학은 조선왕조 창업의 길로 나아가고 한양 천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간 걸리더라도 영구 반환 추진해야

▲ 5월 19일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소장한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의 재현품이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에서 열린 '회암사 사리 이운 기념 문화축제 및 삼대화상 다례재'에 자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는 각각 그 자체로 조명돼야 할 역사적인 수행자들이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왕조 창업의 멘토인 무학대사의 스승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이들은 고려왕조가 문을 닫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그림자를 남겼다.

무학은 노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몽골제국 유학을 갖다 온다 해도 불교계 지도자로 부각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왕으로부터 왕사직을 제안받은 것과 이성계의 멘토가 된 것은 그 자신의 수행과 노력에도 기인하지만, 거물급 승려들이 배경에 있었던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

지공과 나옹의 도움을 받은 승려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 창업의 정당성 여하를 떠나 지공과 나옹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두 선사의 사리가 봉안된 사리구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한국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된다. 이 유물이 식민지 한국 불교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간 뒤 보스턴미술관에까지 가게 됐으니, 이것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식민지배 역사를 청산하는 일이 된다.

이를 일시 대여 형태로 국내에 들여오고 대한민국 정부가 미술관에 대한 반환을 보증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미술관이 불법 약탈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선의의 취득자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치르고라도 사리구를 돌려받는 게 이치에 맞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구 반환을 추진해야 할 사안이 김건희 여사나 윤석열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졸속으로 처리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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