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울음소리는 길조'? 이제 옛말인가 봅니다
구전동요 속 까치는 아이들 해결사였는데... 이젠 유해조류로 취급 당하네요
까치는 우리에게 길조라는 인식이 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담에도 그런 인식이 놓여 있다. 까치를 길조로 대하는 우리의 특별한 인식은 저 멀리 신라 탈해 신화에도 보일 만큼 그 연조가 깊다.
탈해 신화는 이렇다. '탈해'라는 아이는 본래 바다 천리 밖 먼 나라에서 알로 태어나 버려졌다. 궤짝에 담겨 바다에 띄워졌는데 오는 동안 동자가 알을 깨고 나왔다.
버려진 궤짝이 신라 해변에 닿을 즈음 어디선가 까치가 나타나 울면서 동행했다. 뒤에 임금이 될 귀한 손님이었기에 까치가 울음으로 알리며 인도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까치 속담에 부합되는 내용이다.
까치를 좋은 일과 연계짓는 인식은 대중가요에서도 적지 않게 활용된다. 나훈아의 '까치가 울면'을 비롯하여 최안순의 '산까치야', 오은정의 '울산아리랑' 등 사례는 많다. 이런 노래들은 혹 떠난 임이 돌아오지 않을까, 또는 임 소식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의 표현에 까치 울음을 연계짓곤 한다.
그런데 대중가요와 달리 구전동요에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까치 자체를 소환할 뿐이다. 아이들이 이갈 때 부르는 '헌니갖고 새이다오'가 그런 예이다.
까치야 까치야
너는 헌니 갖고
나는 새이 다오
-김소운, <조선구전민요>, 1933, 황해남도 개성
까치에게 빠진 이를 가져가고 새 이를 달라고 했다. 젖니가 빠지면 자연스레 영구치가 나올 테지만 아이의 정서는 그리 한가하지 않다.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쑥스럽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가 다시 나올 일에 대하여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노래는 이갈이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아이의 정서적 부담과 관계된다. 새 이를 가져다 줄 주체를 구체적으로 특정하게 되면서 아이는 까치에게 마음을 의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가 새로 나는 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까치를 통해 해소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사로 까치를 소환하는 모티프는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부르는 노래에도 나타난다. 노래는 티가 들어간 눈을 옆에서 다른 아이가 문질러 주면서 부르는 게 보통이다.
까치야 까치야
네 새끼 우물에빠졌다
조리로 건져라
주걱으로 건져라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경상북도 안동
까치를 불러 새끼가 우물에 빠졌으니 건져내라고 했다.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야 하는 상황에 노래는 까치를 소환했다. 그리고 까치 새끼가 우물에 빠진 것으로 상황을 꾸몄다. 까치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세운 나름의 전략이다.
다음의 노래도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기 위해 부른다. 이 노래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 까치를 소환하지만, 까치를 다루는 방식은 위의 것과 사뭇 다르다.
까치야 까치야
내 눈에 티내라
안 내주면 네새끼
발기발기 찢겠다
튀에 튀에 튀에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충청남도 홍성
까치에게 자신의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라고 했다. 그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새끼를 발기발기 찢겠다고 위협했다. 수행 주체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협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압하는 전략은 주술의 전통적 방식이다. 끝에 보이는 침 뱉는 의성어 '튀에' 소리도 주술을 걸고 마무리할 때 쓴다.
주술의 위협적 전략은 가야의 옛노래 '구지가'에도 보인다. 노래는 구지봉 정상에 알의 형태로 묻혀 있는 수로왕의 출현을 촉구하기 위해 부르는데, 거북에게 머리, 곧 수로왕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북을 구워 먹겠다고 위협한다. 까치에게 주술을 건 위 노래의 방식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흥미롭다.
어른들은 까치 울음에 좋은 일을 연상했고, 아이들은 이갈이나 눈 티 제거 등 몸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까치를 소환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전통적으로 까치가 우리에게 친화적 존재로 가깝게 인식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까치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까치밥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까치밥은 감을 딸 때 새 먹이로 몇 개씩 남겨 놓는 것을 말한다. 남겨진 감은 물론 까치만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에 까치를 내세웠다. 까치밥은 자연 친화적 정서로 새에게 베푸는 일종의 정과 같은 것인데, 그런 대접에 우선 마음이 가는 새가 까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까치에 대한 우리의 친화적 인식은 예전 같지 않다. 까치 울음소리를 듣고나서 좋은 일을 기대하거나 이갈이나 눈 티 제거에 까치를 소환해 노래하는 일도 실상 옛일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최근에는 과수원, 아파트, 전신주 등에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까치를 유해조류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도 문화와 시대에 따라 자꾸 변할 수밖에 없지만, 어쩐지 무언가 하나둘 잃어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가깝게 느껴지던 까치도 저 멀리 가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감나무의 까치밥은 넉넉했으면 좋겠다.
탈해 신화는 이렇다. '탈해'라는 아이는 본래 바다 천리 밖 먼 나라에서 알로 태어나 버려졌다. 궤짝에 담겨 바다에 띄워졌는데 오는 동안 동자가 알을 깨고 나왔다.
▲ 아침에 까치가 울면전통적으로 우리는 까치를 좋은 일의 메신저로 여겼다. ⓒ Pixabay
까치를 좋은 일과 연계짓는 인식은 대중가요에서도 적지 않게 활용된다. 나훈아의 '까치가 울면'을 비롯하여 최안순의 '산까치야', 오은정의 '울산아리랑' 등 사례는 많다. 이런 노래들은 혹 떠난 임이 돌아오지 않을까, 또는 임 소식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의 표현에 까치 울음을 연계짓곤 한다.
그런데 대중가요와 달리 구전동요에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까치 자체를 소환할 뿐이다. 아이들이 이갈 때 부르는 '헌니갖고 새이다오'가 그런 예이다.
까치야 까치야
너는 헌니 갖고
나는 새이 다오
-김소운, <조선구전민요>, 1933, 황해남도 개성
까치에게 빠진 이를 가져가고 새 이를 달라고 했다. 젖니가 빠지면 자연스레 영구치가 나올 테지만 아이의 정서는 그리 한가하지 않다.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쑥스럽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가 다시 나올 일에 대하여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노래는 이갈이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아이의 정서적 부담과 관계된다. 새 이를 가져다 줄 주체를 구체적으로 특정하게 되면서 아이는 까치에게 마음을 의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가 새로 나는 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까치를 통해 해소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사로 까치를 소환하는 모티프는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부르는 노래에도 나타난다. 노래는 티가 들어간 눈을 옆에서 다른 아이가 문질러 주면서 부르는 게 보통이다.
까치야 까치야
네 새끼 우물에빠졌다
조리로 건져라
주걱으로 건져라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경상북도 안동
까치를 불러 새끼가 우물에 빠졌으니 건져내라고 했다.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야 하는 상황에 노래는 까치를 소환했다. 그리고 까치 새끼가 우물에 빠진 것으로 상황을 꾸몄다. 까치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세운 나름의 전략이다.
다음의 노래도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기 위해 부른다. 이 노래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 까치를 소환하지만, 까치를 다루는 방식은 위의 것과 사뭇 다르다.
까치야 까치야
내 눈에 티내라
안 내주면 네새끼
발기발기 찢겠다
튀에 튀에 튀에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충청남도 홍성
까치에게 자신의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라고 했다. 그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새끼를 발기발기 찢겠다고 위협했다. 수행 주체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협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압하는 전략은 주술의 전통적 방식이다. 끝에 보이는 침 뱉는 의성어 '튀에' 소리도 주술을 걸고 마무리할 때 쓴다.
주술의 위협적 전략은 가야의 옛노래 '구지가'에도 보인다. 노래는 구지봉 정상에 알의 형태로 묻혀 있는 수로왕의 출현을 촉구하기 위해 부르는데, 거북에게 머리, 곧 수로왕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북을 구워 먹겠다고 위협한다. 까치에게 주술을 건 위 노래의 방식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흥미롭다.
어른들은 까치 울음에 좋은 일을 연상했고, 아이들은 이갈이나 눈 티 제거 등 몸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까치를 소환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전통적으로 까치가 우리에게 친화적 존재로 가깝게 인식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까치밥은 까치에 대한 우리의 마음까치밥은 새를 위한 배려로서 자연 친화의 정서적 표현이다. ⓒ 공유마당(한국저작권위원회
까치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까치밥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까치밥은 감을 딸 때 새 먹이로 몇 개씩 남겨 놓는 것을 말한다. 남겨진 감은 물론 까치만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에 까치를 내세웠다. 까치밥은 자연 친화적 정서로 새에게 베푸는 일종의 정과 같은 것인데, 그런 대접에 우선 마음이 가는 새가 까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까치에 대한 우리의 친화적 인식은 예전 같지 않다. 까치 울음소리를 듣고나서 좋은 일을 기대하거나 이갈이나 눈 티 제거에 까치를 소환해 노래하는 일도 실상 옛일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최근에는 과수원, 아파트, 전신주 등에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까치를 유해조류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도 문화와 시대에 따라 자꾸 변할 수밖에 없지만, 어쩐지 무언가 하나둘 잃어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가깝게 느껴지던 까치도 저 멀리 가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감나무의 까치밥은 넉넉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구전동요 되살려 읽기>는 이번 회로 종료합니다. 그간 본 연재기사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노래의 범주와 시대를 제약없이 넓게 다루는 기사를 기획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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