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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하동과 구례에서 시작된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 그리고 명량대첩 427주년

등록|2024.10.14 20:27 수정|2024.10.14 20:27

▲ 진도 벽파정과 벽파진 전경.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구체적인 전략을 구상했던 곳이다. ⓒ 이돈삼


지금으로부터 427년 전인 1597년 이맘때,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때 이순신 장군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진도 앞바다에 통제영을 두고 일본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 427주년이 다가왔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일본함대를 물리치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승리를 향한 변곡점을 마련한 전투가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을 앞두고 당시 섬진강변에서 명량으로 가는 이순신 장군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다.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 일대에서 수군을 재건하며 명량대첩을 하러 가는 길이다.

경상도 진주에서 하동을 거쳐 전라도 구례로 온 이순신 장군은 곡성, 순천, 보성 등 내륙에서 수군을 재건하고 장흥에서 13척의 배를 타고 강진, 완도, 해남, 진도, 울돌목으로 갔다.

▲ 섬진강변 구례 대나무 숲길.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명량으로 가던 이순신 장군도 지났을 강변이다. ⓒ 이돈삼


▲ 보성 양산항의 집터. 조선수군 재건하던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많이 손에 넣은 집이다. ⓒ 이돈삼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고 있을 때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대패하면서 궤멸됐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남았다.

위기를 느낀 선조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순신이 수군재건 첫발을 뗀 날이 1597년 음력 8월 3일, 군관 9명 병사 6명과 함께였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구례, 압록을 거쳐 옥과, 곡성으로 이어진다.

순천에선 대포와 화약, 다양한 화살을 구하고 보성에선 군량미를 많이 확보한다. 이순신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이 당시 조양창이 있던 조성면 고내마을과 득량면 박곡마을 양산항의 집이다.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보성에 온 이순신한테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달됐다. 조선수군이 너무 미약하니 육군에 합류해 싸우라는 '조선수군 철폐령'이었다. 음력 8월 15일 추석날의 일이다.

이순신은 밤새 고민 끝에 임금에 장계를 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고, 신이 죽기로 싸운다면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보성 열선루에서다.

보성에 이순신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한 조양성과 양산항의 집터가 조성면과 득량면에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쓴 보성 열선루도 복원돼 있다. 보성읍내엔 장계를 쓰는 이순신의 모습을 떠올려주는 이순신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 보성 이순신공원.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쓰는 이순신 장군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진도대교와 우수영.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일군 현장이다. ⓒ 이돈삼


구례, 곡성 순천 보성을 거쳐 이순신이 찾아간 곳은 회령포, 지금의 장흥 회진이다. 이순신은 여기서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있던 조선함대 12척에 전함 1척을 더해 13척을 손에 넣었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조선수군 출정식을 갖고, 함대를 이끌고 마량 너머 바닷길을 따라 해남으로 향한다.

배를 탄 이순신은 해남 이진과 어란을 거쳐 진도 벽파진으로 간다. 어란에선 정탐 나온 일본군과 땅끝 앞바다까지 추격전을 벌인다. 벽파진에선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밤중 공방전을 벌였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이순신은 우수영에 진을 설치하고, 조선수군과 함께 울돌목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싸워 명량대첩에서 승리를 거뒀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의 일이다. 조정의 지원은커녕 수군 철폐령까지 내려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라도 땅에서 전라도 백성과 함께 조선수군 재건에 성공한 결과였다.

▲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 진도 녹진관광단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울돌목에서의 해상 퍼레이드. 몇 해 전 명량대첩축제 때 해상전투 재현 모습이다. ⓒ 이돈삼


이를 기념한 2024명량대첩축제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울돌목 일원에서 열린다. '불멸의 명량! 호국의 울돌목!'을 주제로 한 축제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 민초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축제는 이순신 장군과 호국 영령을 기리는 '약무호남제례'로 시작된다. 최대 관심거리는 정보통신기술을 버무린 미디어 해전이다. 3면의 대형 LED 스크린을 결합한 다면 상영시스템과 LED 대북, 비전플래그를 활용한 군무로 명량해전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다.

조선수군과 함께 싸운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과 외국인이 참여하는 조선수군 출정 퍼레이드도 눈길을 끈다. 공군 블랙이글스 에어쇼, 울돌목 해상 퍼레이드, 해군 의장대와 군악대 공연도 볼거리다.

수문장 교대식, 조선수군 무예 대회, 강강술래 경연, 청소년 가요&댄스 경연, 그리고 국카스텐의 축하공연, 중국 쓰촨성 예술단 특별공연, 트로트와 댄스 뮤직이 어우러지는 '명량한 밤', 울돌목 낙조를 배경으로 한 감성 발라드 공연도 준비된다.

▲ 해남 우수영 충무사. 우수영대첩비각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 명량대첩기념탑. 해남 우수영관광단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울돌목 부근에 가볼 곳도 많다. 우수영 수변무대에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라는, 의재 허백련의 글씨로 '若無湖南 是無國家'가 새겨진 충무공 어록비가 있다. 고뇌하는 이순신상, 명량대첩 기념탑과 전시관도 있다.

옛 우수영 관아 터에 명량대첩비와 충무사도 있다. 명량대첩비는 1688년 숙종 때 처음 세웠다.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돼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버려졌다. 광복 후 주민들이 옮겨와 원래 자리에 세워놓았다.

진도에 승전공원도 만들어져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이순신 동상이 여기에 세워져 있다. 동상을 빙 둘러 계단으로 스카이워크를 설치해 이순신 장군과 눈도 맞출 수 있다.

진도타워는 울돌목 최고의 전망지점이다. 여기서 울돌목과 진도대교, 해상케이블카가 모두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올망졸망 떠 있는 다도해 풍광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 이순신 장군 어록비. 해남 우수영 관광단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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