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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에서 글 자랑 하지 마라'는 말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장흥 편

등록|2024.10.13 17:06 수정|2024.10.13 17:06

가금도와 선학동가금도는 이승우 작가가 "섬의 한쪽 봉우리가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아래쪽으로 느슨하게 흘러내리는 모양이었다. "의 소재가 된 섬이다. 그리고 천년학 촬영지에서 바라본 선학동 모습이다. ⓒ 이병록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라는 무명작가들 얘기가 있다. 장흥의 딸 한강은 이미 여러 개의 상을 탔던 유명한 작가이지만, 노벨상을 받게 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다. 본인도 영광이지만, 고향 장흥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나로서는 '다녀왔더니 유명해졌다'라는 곳이 장흥이다. 이번 10월 7일에서 8일까지 장흥 지역에 있는 남파랑길 79구간과 80구간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장흥(長興)은 '오랫동안 흥할 곳'이라는 땅이름을 가졌고, 나라호 발사대를 가져서 '높게 흥할 곳'이라는 고흥과 바다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상발마을 앞 자라섬은 삼신할머니가 치마에 흙을 담아서 고흥으로 건너가다가, 치마에 구멍이 나서 흘린 흙이 쏟아져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가깝다.

정동진과 땅끝은 비교적 유명하지만, 정남진은 덜 유명하다. 장흥 시외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정남진 장흥군'이라는 글씨를 버스 앞면에 새겼다. 정남진 등대와 정남진 길과 마을 등 지역 관광명소를 살리려고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산정마을 부근에 400년째 당제를 지낸다는 소등섬 앞에서부터 정남진 표지가 보인다. 이 길을 남파랑길에 포함하면 좋겠다.

길에서 마을을 소개하는 표지판에 풍산길지라는 풍기마을이 있고, 상방마을도 노승봉 밑이 명당이며, 사금마을도 신선이 놀던 명당이라고 씌어 있다. 회진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무명의 수필가 한 분이 이 고장에서 많은 문학가를 배출했다고 자랑한다. 그러면 문필봉이 어떤 산이냐고 물어보니 '천관산'이라고 한다. 장흥은 많은 명승지를 가진 고을이다.

그래서인지 '장흥에서 글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인이 많다. 사금마을 방파제에 장흥 출신 이승우 작가의 글들을 표지판에 세워 놓았다. <샘 섬>에 "섬 한군데에 무슨 상징처럼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나 <정남진행>에서 표현하는 가슴앓이, 아래쪽으로 쳐진 어머니의 가슴이라고 표현한 섬이 바로 앞에 있는 가금도와 많이 닮았다.

하룻밤을 머문 회진항에서 바다를 보면서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집은 왼쪽으로 3.1km이고, 지나쳐 온 신상리 마을이다. 이청준 작가 생가는 오른쪽으로 3.7km이고, 다음날 가는 길에 있다. 선학동 옆 동네 진목리에 이청준이 태어났고 말년에 귀향하여 문학작품을 썼다.

이청준 작품 <선학동 나그네>는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천년학>의 원작이다. 영화 촬영장은 회진을 벗어나자마자 바닷가에 그림처럼 예쁘게 서 있다. 그런데 선학동의 본래 이름은 산 밑 마을이란 '산저마을'이었다. 산밑의 평범한 산을 예술의 힘이 학으로 만들었다.

남파랑 길은 '이청준, 한승원 문학길'로 소개돼 있지만, 작가 생가는 들르지 않았다. 이번 여행 최대 목적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인 회령포(회령진성)로써 지금의 회진이다. 퇴직 후에 수필로 문단에 등단한 문인이고, 여행작가 등단을 준비하고 있지만, 내 피는 아직 무인의 피가 더 진한 것 같다.

회진은 백의종군을 끝내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된 장군이 경상 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은 12척의 함선을 인수한 곳이다. 이곳에서 소위 취임식에 해당한 '회령포 결의'를 가졌고, 이곳 주민들의 도움으로 함선을 정비했다.

수군을 파하고 육지전을 택하라는 선조의 지시에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곳에서 전력을 정비하여 명량해전에서 한 척이 추가된 열 세척 전선으로 적군을 무찌른다. 만일에 고분고분히 왕의 명령을 따랐다면, 왜 수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한양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이처럼 장흥은 과거에는 무(武)로 나라를 유지하게 했고, 지금은 문(文)으로 나라를 빛내고 있다. '순천에서 인물 자랑, 벌교에서 주먹 자랑, 여수에서 돈 자랑, 진도에서 소리 자랑, 장흥에서 글자랑 하지 마라'는 말을 이번에 장흥에서 증명했다. 장흥은 문학의 고장으로 더욱 우뚝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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